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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남길 것인가?” 갈라디아서 6:11-18

임수병 목사 (필라사랑의교회)

오늘까지 나는 이 땅에 과연 무엇을 남기며 살았을까요? 오늘 본문에 두 단어가 나의 살아온 날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먼저 ‘자랑’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자랑하고(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내가 지금 이 땅에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을 3C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children, carrier, character.’ ‘자녀들’이 자랑이고, 내가 이뤄놓은 ‘업적’이 자랑이고, 자기의 ‘성격’이 자랑입니다. 자랑을 따라가 보면 내가 남긴 것들이 보입니다. 또 하나는 ‘흔적’이라는 단어입니다. 나눔을 남긴 사람이라면 사람들 가슴에 감사의 흔적들이 보일 것입니다. 미움을 남긴 사람이라면 사람들 가슴에 상처의 흔적들이 보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 결과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까? 오늘 바울이 무엇을 ‘자랑’했고 어떤 ‘흔적’이 있었는지 관찰하면서, 이 땅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라!

 

오늘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할례’ 얘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것, 그래서 ‘흔적’으로 남기려는 것이 할례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흔적입니다. 바울이 할례 문제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복음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믿음 외에 할례를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2절) 유수한 로마 식민지 가운데 유독 유대인들은 자기 종교를 목숨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유대인들만은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막 생겨난 신생 종교이기 때문에 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표시가 되는 할례를 받아서 박해를 피하라 유혹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할례를 받으라’고 꼬드긴 이유는, 13절에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13절) 할례를 받으면 육체로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유대인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율법의 후손처럼 되는 것이니, 이방인이라도 유대인들 앞에 자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박해도 피할 수 있고, 또 육체의 흔적으로 자랑할 수 있으니, ‘why not?’ ‘할례를 피할 이유가 뭐가 있냐?’ 저들을 유혹하면서 할례를 자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할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이 땅에서의 박해를 피하는 흔적이지만, 십자가는 마지막 날 심판을 피하게 되는 흔적입니다. 할례가 ‘자력 구원’을 상징한다면, 십자가는 ‘은혜’로 구원받음을 상징합니다. 할례가 ‘자기의’를 상징한다면, 십자가는 ‘예수의 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선포한 것입니다. 저들은 ‘육체(할례)로 자랑’하지만,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14절) 

십자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얼마나 확실했던지 바울은 이런 당찬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십자가를 자랑하다 보니, 세상이 나를 대하여 죽었고, 내가 세상을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저는 이 바울의 정신세계가 너무나 부럽고, 너무나 놀랍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너무 위대하고 고상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가 도무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여서, ‘너-세상이 나를 대하여 죽었다.’ ‘너-세상이 내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 ‘내가 죽은 게 문제가 아니라, 너-세상이 내게 죽은 것이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자랑거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육체의 흔적’ 할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흔적’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

 

고로 이제부터 나는 그 흔적,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면서 살겠다 말씀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 갈라디아 교회들이 얼마나 바울을 괴롭게 했나요? ‘너도 사도냐’ 하면서 그의 사도권을 사사건건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전한 복음마저도 변질시키고 말았던 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내게는 너희들이 흔들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흔적이란, 예수로 인해 매 맞고, 예수로 인해 고통받았던 바울 몸에 새겨진 흔적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사도라는 증거, 그 이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흔적’이란 말은 원어로 ‘스티그마타’, 영어로는 ‘stigma’입니다. 이 ‘스티그마타’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문신’ 혹은 ‘낙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노예는 불에 달군 인두로 몸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개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노예라는 흔적(스티그마타)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스티그마타’는 표준 새번역에서 보는 것처럼, ‘상처 자국’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 때문에 받은 ‘상처 자국’이기도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흔적이란, 그의 등에 난 ‘상처 자국’입니다. 로마 당시에는 상처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나 배, 앞쪽에 난 상처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받은 ‘영광의 상처’였습니다. 하지만 등에 난 상처는 노예의 상처, 죄수의 상처였고, ‘불명예의 상처’였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던 바울,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던 바울의 등은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상처가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흔적, 어떤 영향을 주며 살아왔을까요? <화살과 노래>라는 시에서 시인 롱펠로우는, 우리는 인생살이 속에서 둘 중의 하나를, 공중에 던지며 산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화살’이고, 또 하나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먼 훗날 우리가 던진 그것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보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아주 오래 지난 후에, 나는 참나무 속에서/ 화살을 찾았네. 아직 부러지지 않은 그것을/ 그리고 노래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을 다시 찾아냈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에 화살을 쏘았고, 누군가의 가슴에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살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화살’을 남겼을까요, 아니면 ‘노래’를 남겼을까요? 

 

남겨야 할 것, 오직 은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기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게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누군가의 가슴에 희망이 되는 노래를 남기고, 예수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말을 오히려 정면으로 뒤집는 말입니다. 그럼, 왜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얘기한 것일까요? 자기 등에 있는 훈장을 보여주면서 ‘자랑’하려고 꺼낸 말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흔적을 자랑하고, 할례를 자랑하고 있는 저 유대주의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바울은 그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지, ‘바울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 때문에 받은 흔적 하나쯤 없으면 부끄러울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너는 무엇을 남겼니?’ 그때 우리는 예수 때문에 받았던 어려움들, 예수님 때문에 거쳐야 했던 고생의 눈물들, 그 상처와 흔적들을 보여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에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한 흔적, 예수를 위해 부른 노래를 보여주려고 할 그때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 나 때문에 당하신 그 ‘예수의 그 흔적’을 말이죠. 그리고 그 흔적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크고 높으신 분이 나처럼 되신 것만도 감당할 수 없는데, 죽음의 자리, 저주의 자리, 고통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을 보고, 우리는 내 몸에 난 상처들과 내 마음에 난 흔적들을 슬며시 숨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남겼느냐?’ 물으실 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남긴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절) 

 우리가 남겨야 할 것, 그것은 분명히 예수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 때문에 받은 나의 흔적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여기에서 망한 것입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회들이 여기에서 넘어진 것입니다. 오늘 수많은 교회들이 여기서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자기 자랑으로 망한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인데 ‘나의 흔적’이라고 자랑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 대형교회 50개 중 23개가 한국교회라는 자기 자랑, 세계에서 선교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라는 자기 자랑! ‘자기 자랑’이 있는 곳에 ‘십자가’가 설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예수의 흔적이란, 나를 관통하여 뚫고 지나간 예수의 흔적일 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하는 자의 몸을 뚫고 지나간 은혜의 흔적일 뿐입니다. 마리아의 고백처럼 ‘주의 계집 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무익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문턱에서 ‘무엇을 남겼는가’ 물으실 때 자기의 흔적을 보여주는 자에게 주님은 ‘나는 저를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의 ‘흔적’을 붙잡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고백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가 이 땅 가운데 무엇을 남겼는지, 내 인생의 성적표를 잘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장례식입니다. 내가 한평생 무엇을 자랑스러워했고, 내가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나는 나의 장례식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장례식은 내가 주인공인데, 나는 초대받지 못한 주인공일 것입니다. 작년 11월 “악동 뮤지션” 이찬혁 군이 ‘청룡영화상 시상식’ 축하공연을 했습니다. 그날 부른 노래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노래 제목은 ‘장례 희망’(Funeral Hope)이었습니다. 천국에 가 있는 내가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익살스러운 내용의 가사입니다. 아는 얼굴 다 모였네 여기에/ 한 공간에 다 있는 게 신기해/ 모르는 사람이 계속 우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 미안해/ 종종 상상했던 내 장례식엔/ 축하와 환호성 또 박수갈채가/ 있는 파티가 됐으면 했네/ 왜냐면 난 천국에 있기 때문에/ 오자마자 내 몸집에 서너 배/ 커다란 사자와 친구를 먹었네/ 땅 위에 단어들로는 표현 못 해/ 사진을 못 보내는 게 아쉽네/ 모두 여기서/ 다시 볼 거라는/ 확신이 있네/ 내 맘을 다 전하지 못한 게 아쉽네/ 할렐루야/ 꿈의 왕국에 입성한 아들을 위해/ 할렐루야/ 함께 일어나 춤을 추고 뛰며 찬양해/ 턱시도와 드레스로 차려입은 스타들 앞에서, 내로라하는 기라성같은 배우들 앞에서 이찬혁은 춤을 춥니다. 다윗처럼 춤을 덩실덩실 춥니다. 정말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옵고 그 기쁨의 장소로 들어간 자의 감격으로 춤을 춥니다. 내가 이 땅 가운데서 자랑하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붙잡았던 예수의 흔적 때문에 지금 천국에서, 사자와 친구를 먹고, 나의 영원한 친구되신 그 분과 함께 천국에 있음을 감사하면서 우리도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직 예수의 은혜만이 남길 바랍니다.

colippastor@gmail.com

 

01.1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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