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습니다.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역지즉개연은 처지나 경우를 바꾼다 해도 하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은 태평한 세상에 자기 집 문 앞을 세 번씩 지나가도 들어가지 않아서 공자(孔子)가 이들을 매우 훌륭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는 어지러운 세상에 누추한 골목에서 물 한 바가지와 밥 한 그릇으로만 살았는데, 공자는 가난한 생활을 이겨내고 도(道)를 즐긴 안회를 칭찬하였습니다. 맹자는 “하우와 후직과 안회는 같은 뜻을 가졌는데, 하우는 물에 빠진 백성이 있으면 자신이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그들을 빠지게 하였다고 여겼으며, 후직은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을 잘못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우와 후직과 안회는 처지를 바꾸어도 모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禹稷顔子易地則皆然)”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하우와 후직, 안회의 생활방식을 통하여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말하였습니다.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헤아려보라는 말입니다.
며칠 전 한국 교계를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분당 W교회 목사님께서 2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기자의 사설에 의하면 “최근 일부 대형교회들이 교회 건축이나 재정 비리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현실에서 분당 W교회의 대형교회 포기 선언은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라고 환영의 뜻을 보였습니다. 그 교회는 개척한지 10년을 맞는데 건축을 하지 않고 학교 강당을 사용하는 교회로 주목 받은 바 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앞으로 10년 동안 교인들을 잘 훈련시켜 2분의1에서 많게는 4분의3 정도의 교인들을 분당우리교회보다 연약한 교회로 파송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고 뜻을 밝혔습니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2005년 인구주택 총 조사 결과 기독교인의 숫자가 1천200만이 아닌 861만 명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기독교계 인사나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에서 사용해왔던 “1천200만-1천300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10년 전인 1995년 876만 명에 비해 14만4천명이나 줄어든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에 비해 교인 수가 만 명이 넘어가는 대형교회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교회들에게서 큰 교회로 이동된 수평이동이라는 예측을 갖게 합니다.
실제적으로 이민목회를 하는 이곳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누구나 겪는 고통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행 자율화로 예전과 많이 다르지만 한국에서 오시는 초기 이민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많은 수고를 하십니다. 집을 렌트해주는 것,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 운전면허증을 내는 일 등 심지어는 직업 알선까지도 도우면서 안정되게 이민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돌봐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은 아이들의 학교 문제, 직장문제 혹은 보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좋은 주거환경으로 이사를 한다든지 대형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작은 교회 교역자들은 물론 교역자 가족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힘써 일군을 만들었는데...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초신자 가정을 잘 훈련시켜 집사가 되어 이제 교회를 섬기며 일할만 한데 금번에 이웃 대형교회로 갔지 않았겠어! 아내는 너무 속상해서 병이 났어... 난 못자리 목회야! 키워서 대형교회로 보내야하니!” 한숨 쉬며 안타까워하던 가까운 동료 목사의 넋두리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 한국 정부에서는 작은 슈퍼마켓을 돕기 위해 대형 마트들을 일시 휴업에 동참하게 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작은 실개천이 모여 큰 강물을 만들듯이 실개천이 없다면 큰 강물은 결코 흐르지 못할 것입니다. 실개천이 보잘 것 없어 막아버리거나 없애버린다면 강물은 마르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