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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4)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C. 성경의 명료성 (Clarity)

 

성경의 명료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평범한 말로 기록되어졌다. 물론 난해한 부분들도 있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거의 해결되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위하여 교사와 목사들을 세워주셨고, 또한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약 1:5)

성경 명료성의 의미는 성경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벧후 3:16, 베드로가 바울의 글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중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있느니라”고 했다. 

또한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에는 신비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명기 29장 29절은 “은밀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느니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명료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케빈 드영 (Kevin DeYoung)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성경에서 명백하게 가르치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성경에서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스스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수 있고, 성경을 통하여 영적인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Kevin DeYoung, Taking God at His Word).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동일하게 평이한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꼭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은 성경의 여기저기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열려 있어서, 유식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평범한 수단을 바르게만 사용하면, 그것들의 충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아니한 부분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믿는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인간의 지혜, 논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조명해 달라고 시편 저자와 같이 간구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말하듯이 우리가 성경의 모든 구절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특정 부분에 대한 이해가 늘어남에 따라 다른 부분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 / 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 말을 매우 좋아했다. 우리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연구함으로 명확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면서 성경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신다.

우리는 5살 된 아이에게 15살 된 청소년의 행동을 요구하지 아니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이해가 커짐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갖도록 성장하게 하신다. 신앙이 어릴 때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 별로 괸심도 없고, 그러한 믿음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고 찬송과 감사를 드린다. 신앙의 성장과 함께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시각을 더욱 확장시킨다.

성경의 명료성의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캐톨릭 교리에 반대하면서 발전시켰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을 근거로 “가르치는 권위 (the power of teaching , potestas magisterii)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사도시대 이후에는 사도직을 계승한 교황과 주교에게만 가르치는 권위가 주어졌다고 한다. 이런 로마 카톨릭의 주장은 성경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카톨릭의 이러한 교리를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모든 진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함을 위한 교훈은 성경에서 모호하지 아니하고, 명료하게 가르치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것들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보통의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에 잘 나와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아니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예를들면 성경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말씀도 있고, 또한 동시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 (딤전 6:7) 라는 말씀도 있다.

성경에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극적 사고방식 비슷한) 성공하라는 말씀도 있고, 동시에 더 많은 것을 구하지 말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씀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미국의 19세기에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는 노예문제이다. 북부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노예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Northern Abolitionists) 남부 교회에서는 성경에 노예제도를 폐지란 말이 없는데 그것을 주장하면 성경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족장들과 신약시대의 교인들도 노예가 있었다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노예제도 폐기를 반대했다. 미국의 남부 교회에서는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을 가족처럼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북부의 공장 주인들이 노예제도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북부에서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노예보다 더욱 학대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남북의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모두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에 관한 그들의 입장은 크게 달랐다.

이와같이 성경의 명료성을 우리가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매우 큰 혼란 속에 빠질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성경을 왜곡시킬 수 있다.     

 어느 목사님께서 창 9:25을 이렇게 해석하고 설교를 하셨다. 창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 목사님은 함의 자손들 (흑인들)은 노예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는데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면서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그 목사님의 성경 해석이 정당한가? 그 목사님이 성경의 명료성을 바로 이해한 것인가?

신앙의 영웅들인 아브라함, 야곱, 다윗등은 여러 명의 부인들 두었다. 오늘 우리가 볼 때에 과연 다윗이 성군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볼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문화적인 차이로만 볼 것인가? 물론 성경이 기록된 당시 고대사회와 지금 현대 사회의 수천 년간의 시간적인 차이와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그때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지금의 기준은 다른가?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고대사회의 신앙 원리와 지금의 신앙의 원리가 다를 수 없다. 

물론 고대와 현대의 문화적인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아니하다.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문화적인 차이를 너무 과장하면 안된다. 그때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때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오늘 21세기에도 동일한 타락한 인간들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그 연구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 사이의 간격을 극복할 수 있다. 

“그 때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신학적인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미국에 Christian Reconstructionist (기독교 재구성 주의자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그랙 반센 (Greg Bahnsen), 루사스 루스두니 (Rousas Rushdoony), 개리 놀스 (Gary North)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구약의 사회법 (civil law)을 현대 사회에 맞도록 도입하자는 입장이다. 현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죄수들을 감옥에 그냥 수감 해 놓지 말고, 사회에 나와 살아나갈 수 있도록 적당한 기술을 가르쳐야 하며, 그리고 도둑질을 하면 감옥에서 시간으로만 해결하지 말고, 앞으로 자기가 갚아야 할 책임을 가르쳐주며, 실제로 갚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여건을 만들자는 주장 등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좋은 성경 주석들과 연구 서적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를 잘 연구하면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볼 때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문제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상호조화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의 명료성을 이해할 때에 죄가 우리의 지적 활동에 영향을 끼쳐 (noetic influence of sin)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부정적이고, 왜곡되고, 편파적인 이해를 갖도록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인간의 타락은 지,정,의를 비롯한 우리 인간 전체를 타락시켰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 17:9).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타락성을 지적한다. 타락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편하고 유익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19세기 미국 남부 교회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하도록 성경을 해석하여 노예제도가 마치 성경적인 것 처럼 설교하고, 이론을 전개했다. 왜냐하면 당시 교인들의 대부분은 거대한 농장을 자기고 있었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면 그들은 수십, 수백 에이커가 되는 농장을 경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남부 교회 지도자들은 노예제도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노예제도 폐지는 비성경적이며, 노예제도가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 전체가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보지 아니하였고, 죄가 지성에 큰 영향을 끼쳐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으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원리를 가져야 한다. 실제적으로 성경의 명료성을 생활 속에 적용시키는 가운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명료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른 성경 해석의 틀을 가져야 한다. 성경을 전체적인 입장 (성경신학적)에서 바로 해석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각 시대마다, 교회마다, 개인마다 필요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 적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성경의 명료성의 결론는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함과 성경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에 달려있다. 

KHL0206@gmail.com

08.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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