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침례대학교 교수)
다음 주말로 예정된 이사를 위해 지난 주말에 거라지 세일을 했습니다. 4, 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은퇴자 마을로 이사하려고 합니다. 지금 사는 집은 땅이 넓고 나무가 많아서 전원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사면에 세워져 있어서 비탈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약간 부담스럽습니다. 또 고속도로 옆에 있어서 현관문만 열면 자동차 소음이 들립니다. 새로운 집을 찾다가 은퇴자 마을에서 아담하고 조용해 보이는 집을 찾았습니다. 은퇴를 하지 않아도 55세 이상이면 입주할 수 있다기에 평지에 지어진 그 집으로 옮겨가기로 했습니다.
막상 이사하려고 보니 살림살이가 참 많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나눠줄 것은 나눠주고 팔 수 있는 것은 거라지 세일해야 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시청에서 거라지 세일 허가를 받으려면 이틀 정도 걸린답니다. 주초에 인터넷으로 신청을 했는데 목요일 오전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오후에 전화로 문의해보니 담당직원이 컴퓨터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며 다시 신청하라고 했습니다. 신청서를 재작성하고 확인 전화를 했더니 곧바로 이메일을 통해 허가서를 보내주었습니다.
불필요한 가구와 한 동안 구석구석에 쌓아두고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들을 차고 앞 드라이브웨이에 늘어놓았습니다. 주방용품, 전자제품, 악기, 연장, 액자, 책, 장난감, 등등,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아서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조그만 피아노는 너무 무거워서 사진을 찍어 내어놓았습니다.
아내가 언젠가 아이들이 사다놓은 넘버2 연필 한 박스를 어디서 찾아 꺼내왔습니다. 24자루가 들어가는 박스에 서너 자루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 연필들을 보는 순간 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내가 또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전에 한 한인 마켓의 푸드코트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국수가 생각나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부모님은 화곡동에서 문방구점을 개업했습니다. 큰 아들의 아명을 따라 승진문구이라고 이름을 짓고 십여년 동안 장사를 했습니다. 조그만 가게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문구류와 잡화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고객은 주로 동네 꼬마들과 학생들이었습니다.
한번은 부모님이 아들 가족을 보러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마트를 돌아보던 중 한 편에서 문구류를 발견했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넘버2 연필 박스들을 챙겼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가져다 줄 선물을 구입하시는 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열대에 있는 대여섯 박스의 연필을 모두 사겠다고 하셔서 “아니, 그렇게 많이 사서 뭘 하려구요”하고 질문했습니다. “가게에 갖다 놀라구.” 그제야 문구점에서 팔기 위해 연필을 사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그거 팔아서 돈을 얼마나 번다고 그렇게 사가요?” 퉁명스럽게 말할 때 마음이 짠하고 불편했습니다. 시골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무일푼으로 상경해서 판자집에 살며 시장에서 채소를 팔다가 사진관을 차렸고 칼라사진이 보편화 되면서 사진관을 접고 문구점을 시작했던 부모님의 가난하고 힘든 역사를 너무 잘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도 못 되었기에 죄송한 마음이 짜증 섞인 말로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를 늘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대학교 다닐 때도, 유학생 시절에도, 그리고 이민자의 삶을 살 때도.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속으로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고치겠다고 여러번 결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너무 편하고 만만했기 때문인지 또다시 냉랭하고 무례하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구입해서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비행기가 더디게 날아가는 내내 좀 더 사실 수 있다면 이제는 정말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드려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큰 아들을 기다리다가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유해를 받들고 장지로 향하는 동안 어머니의 희생이 생각나고, 어머니한테 다정다감하지 못했던 것이 나서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그런데 거라지 세일하는 날 아침 아내가 들고나온 노란색 넘버2 연필을 보자 평생 고생과 수고의 삶을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시 생각나고, 어머니를 살갑게 대하지 못한 죄책감과 후회가 다시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왔던 것입니다. 연필을 등지고 서서 눈물을 멈추기 위해 애쓰느라, 또 우느냐는 아내의 핀잔에는 제대로 대꾸도 못했습니다.
팔 물건들을 대강 정돈해 놓고 집 근처 이곳저곳을 다니며 안내 푯말을 세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동생이 와 있었습니다. 동생이 형수로부터 넘버2 연필 이야기를 듣더니 그 연필을 자기 집에 두겠다고 가지고 갔습니다. 그게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고 고마웠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펼쳐진 물건들을 구경했습니다. 터무니없이 싼 값을 붙여놓은 물건들을 하나 둘 사갔습니다. 다 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드라브웨이 한쪽이 휑하게 비었습니다. 이삿짐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남은 것들은 구세군에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할 계획입니다.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지만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마음이 뿌듯한 하루였습니다.
jonk@dbu.edu
05.13.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