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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찬송일세”

2023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감하고 2024 신년을 맞이하며 올해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고백 해야 할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페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1915) 여사가 쓴 찬송 중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에 나오는 “Bless the assurance, Jesus is mine.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축복의 확신, 예수님은 나의 최고봉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고, 나의 찬송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붙들고 시편 145편에 나오는 삼위 하나님을 송축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복음을 향한 내면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시편 145편 저자가 기록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2)  찬송을 보면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축”의 단어가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삼위 하나님을 축복하는 송축의 단어에 담긴 히브리 단어는 바라크 (ברך) 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무릎을 꿇는다(kneel down)"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절대적 항복이고 순종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가운데  필자의 책상위에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그림 ‘탕자의 귀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유난히 ‘바라크’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기게 됩니다. 그것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아버지의 품 안에 바짝 조아린 채,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모습을 비추는 둘째 아들의 자세가 강하게 필자의 시선을 고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아버지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모습, 이것이 진정한 ‘송축’의 단어를 충족하게 하는 것이라 믿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삼위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이 당연한 것은 우리는 분명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깊이 각인하고, 그것에 진정한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의학과 상담학 그리고 심리학을 통합시킨 위대한 영성 심리학자 폴 투루니에(Paul Trurnier, 1898-1986)는 “십자가가 최고의 실패인 동시에 최고의 승리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최고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가 가장 치욕의 모습으로 비추어 지지만 그것이 결국 최고의 영광이란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크로스비 여사가 고백한 “Bless the assurance, Jesus is mine.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을 가지고 삼위 하나님을 송축하며 바른 복음을 퇴색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지속해서 바뀌고, 저항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말 속에 하나님을 감히 피고석에 앉혀놓는 무의식적, 의식적 행위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 가 쓴 “피고석의 하나님” 에서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경우에는 그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이 피고석에 계십니다. 인간은 상당히 이해심이 많은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이 전쟁, 가난, 질병을 허용하신 일에 대해 조리에 맞는 항변을 내놓으시면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재판은 하나님의 무죄 방면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있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100년이나 가까이 전에 썼던 이 글이 오늘의 기독교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부분에 있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 놓고는 변론하는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은 아주 인자한 재판관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려 합니다. 하나의 예로 오늘날 예배는 이런 잘못을 범하기 쉽게 급격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회중들은 목청껏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송하며, 말씀에 반응하여 결단하려 하기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재판장 자리에 앉아 무대 위의 인도자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평하며 한 시간의 예배 시간을 보내는데 더 익숙해집니다. 무대 위에 인도자들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과 칭송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회중들의 취향에 맞추어 달콤한 미사여구를 찾기에 더 관심이 집중되고 예술적 아름다움에만 더 집착하려 합니다. 

회중들, 그리고 무대 위의 모든 인도자들은 기능인이기 이전에 동등한 자격을 갖춘 예배자들입니다. 유일한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만을 칭송하고 높이고 송축하는 일만 하도록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저해하려는 세상을 향해 강하게 저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혁명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체스터던 (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 이 쓴 책 ‘정통’에 보면 “당신이 하얀 기둥을 내버려두면 그것은 곧 까만 기둥이 될 것이다. 만약 그 기둥이 하얀색을 유지하려면 페인트칠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당신은 언제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둥이 검게 변질되지 않게 지속적으로 하얗게 칠을 하며 저항해야 하겠습니다.

위와 같이 삼위 하나님을 송축하며 우리가 지속해서 바뀌고, 저항해 나감에 있어 때로는 나의 그릇이 비록 한 달란트, 혹은 그 이하처럼 나약하다고 느껴질 때 칼빈(John Calvin, 1509-1564)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저급하거나 초라한 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빛나지 않거나 귀중한 것은 없다.” 나의 있는 이 자리에서 바라크 (ברך) 송축의 찬양, 최고의 헌신을 다해 드리는 혁명의 찬양 “Bless the assurance Jesus is mine.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축복의 확신, 예수님은 나의 최고봉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고, 나의 찬송입니다.”를 드리며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게 바뀌고 저항해야 합니다.  

iyoon@wmu.edu

01.1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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