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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의 시대에서의 소통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현대는 소통의 시대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이 잘되는 시대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되었다. 글로벌 시대다. 하지만 현재의 인간관계나 사회를 보면 최악의 불통 시대다. 한국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큰 정치적인 문제는 ‘불통’이라고 한다. 야당은 대통령이 국민과 불통하는 불통정치라고 주장한다. 여당은 야당이 국민의 뜻을 모르는 불통정당이라고 비판한다. 국제정세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립외교를 하는 북한의 문제는 불통이다. 국민과도 소통하지 않고 또한 다른 나라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소통이 안되면 다른 것들이 좋아도 힘들다. 소통은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소통이 잘되면 행복한 가정이지만 불통이 되면 지옥으로 변한다. 교회도 잘 소통되고 교제가 되면 교회생활이 기쁘다. 하지만 교회에서 불통이 되면 외롭고 상처를 입고 쓴 뿌리가 생긴다.

미국의 퓨(Pew)리서치센터에서 2009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세대별 차이는 불통인 것을 보여준다. 컴퓨터 사용 방법은 86%가 차이를 느낀다. 좋아하는 음악의 차이는 86%, 일에 대한 윤리는 80%, 도덕적 가치관은 80%, 다른 사람에 보이는 존경심은 78%가 차이를 느낀다. 정치적인 견해는 73%가, 종교적 신앙은 68%, 다른 인종과 그룹에 대한 태도는 70%가 차이를 느낀다. 세대적 불통의 시대라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의 불통은 다음세대가 없는 위기를 서방의 교회는 물론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도 맞고 있다. 한인교회들도 영어권이 없는 교회들이 점점 많아진다.

어떻게 최고의 소통 시대에서 불통의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은 불통의 원인과 소통의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은 소통의 근원되심을 믿어야 한다. 소통의 시대에 ‘소통신학Communication Theology’란 단어가 생겼다. Robert E. Webber는 “우리가 소통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신6:4). 하나님은 우리가 들을 줄 알도록 창조하셨다. 우리가 듣기를 기대하신다. 그리고 항상 그 대화를 주도해 가신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하나님은 소통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소통이시라면 누구와 소통하시는가? 첫째, 하나님 소통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소통의 주체가 되신다. 삼위일체가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요17:24)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소통하셨다(요17:5).

둘째, 하나님의 소통의 대상은 피조물이다. 기독교의 창조교리는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세상이 아니고, 세상 또한 하나님이 아님을 선언한다. 창조교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성을 입증한다. 창조물과 피조물의 관계는 하나님과 아들 성자 예수님과의 관계와는 다른 관계다. 그럼에도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피조물이다. 사단은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죄를 짓게 함으로 파괴한다.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깨어진다. 죄는 소통을 파괴한다. 하나님께서는 소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과 소통하기를 계속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진 소통을 회복하신다.

소통의 대표적인 모형은 성육신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초점은 성육신 사건이다.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모형으로 만들고 숭배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금지하셨다(출20:4).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특별한 표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창1:26). 놀라운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어서 경배하지 못하게 금하셨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소통의 하나님이신데 왜 세상은 불통인가? 죄로 소통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죄는 소통을 파괴한다. 세상의 소통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남북대화, 6자회담, 각종의 정상회담이 소통 같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이것들은 ‘소통을 위한 소통’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손해 보지 않는 한 소통한다. 하지만 손해 보는 즉시 깨어지는 것이 세상의 소통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분리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인간이 듣지 못한다. 귀를 막는다. 죄로 인하여 소통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소통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그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다(마1:21). 소통을 단절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은 성경 전체에 가득하다.

죄로 인해 파괴된 소통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1)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소통의 붕괴가 왔다(창3:8). (2)죄로 인한 소통의 파괴는 인간 자신과의 소통의 붕괴가 왔다. 인간이 자신과 참된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창4:12). 하나님과 불통한 인생은 자신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3)죄로 인한 소통의 파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의 단절은 물론이고, 가인의 자손들이 만드는 사회는 더 파괴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잃은 죄악문화는 파괴와 폭력과 살인의 문명이 된다(창4:23-24). 회개함이 없는 소통을 위한 노력인 바벨탑은 더 큰 불통의 원인이 된다(창11장). (4)죄로 인한 소통의 파괴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자연과의 소통이 깨어지니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간다(창3:17-19).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창4:11). 가인은 그 지면에서 쫓겨난다(창4:14).

세상이 온통 소통을 외치지만 소통이 되지 않는다. 전부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소통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통이 실패하는 더 큰 이유는 죄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와의 대화와 소통을 주장하는 캐톨릭의 바티칸공의회II나 WCC의 소통운동을 반대하는 이유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시도들은 소통을 위한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소통을 위한 소통은 한계가 있다. 아니 인간의 자만을 충족하기 위한 소통은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소통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통의 회복자시다. 소통의 회복을 위한 역사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범죄한 인간과의 소통을 위해서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개입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통의 회복자시다. 성육신은 죄문제를 해결하고 근본적인 소통의 회복을 위해서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소통이 회복되게 하신 것이다. 성령충만의 첫 증거도 소통이다. 바벨탑에서 잃어버린 언어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 안에서 ‘소통의 회복’을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은 소통의 회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소통의 사명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회복된 공동체로서의 교회다. Webber는 ‘교회를 회복된 소통의 공동체’로 정의한다. 교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사랑도 소통이고, 교제도 소통이다. 기도도 소통이고, 믿음도 소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 이해하는 것도 소통이고, 말씀을 증거하는 것도 소통이다. 그리고 이 소통이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물론 가정에서도 하나님과의 소통이 일어나야 한다. 소통이 깨어진 가정은 불행하다. 소통의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 죽어서가는 천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모형인 교회공동체이고 가정이라는 사실이다.

성육신의 신학은 우리의 문제를 극복할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해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7). 그리스도는 참으로 겸손하시며 철저하게 온유하셨다. Thiessen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삶의 모범을 주기 위해 오셨다”라고 말한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고 소통케 하시기 위해서 오신 성육신의 낮아지심은 우리도 믿지 않는 사람, 소외된 사람,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가야 함을 보여주신다.

2015년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불통의 세대를 끝내고 새로운 그리스도 안의 소통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소원한다. 불통의 사회에서 소통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한다. 이메일:revdavid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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