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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충만 시대 속의 화평케 하는 자들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온 세계가 폭력의 소용돌이의 깊은 수렁 속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미국내 남부의 흑인 폭동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폭력이 가득하다. 이라크에 침공한 IS의 무차별 살인,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사태,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의 폭력, 부족과 나라 사이의 수많은 내전과 군벌들의 폭력, 남미의 마약과 관계된 폭력 등 모든 대륙에서 극심한 폭력으로 인한 열병을 앓고 있다. 진정한 peace-maker 화평케 하는 자가 없다. 일반적으로 폭력을 구분할 때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의 특성에 따라서 3가지로 나눈다. 1)자기주도 폭력self-directed violence 2)대인관계 폭력interpersonal violence 3)집단적 폭력collective violence으로 나눈다.

먼저 자신을 상해하는 것은 자살적 행동과 자기학대로 나눌 수 있다. 집단적인 폭력도 복잡한 양상을 띤다. 사회적인, 정치적인, 경제적인 폭력이 있다. 부족전쟁을 위시해서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세계 전쟁도 포함한다. 산업혁명 이후로 전쟁의 치사율은 급히 증가되었다. 무기의 발달 때문일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4천만명, 2차 세계대전은 7천만명이 넘은 사상자를 냈다. 역설적으로 역사가들은 지난 세기에 세계적인 대전이 있었지만 총 사상자의 수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일리노이드대학의 Lawrence H. Keeley 교수는 저서 War Before Civilization에서 해마다 한번 이상 전쟁을 치르는 부족들은 87%라고 했다. 그리고 65%는 지속적인 전쟁을 한다. 또한 고대의 전쟁의 사망률은 현대전의 1%의 비해서 엄청나게 높은 60%나 된다. 현대전에서 무고한 사상자가 많다는 비난의 여론이 높지만 부족전쟁이나 현대전쟁 이전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다.

물론 폭력 속에서는 비신체적인 폭력도 동일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힘을 가진 자의 위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능동적으로는 협박이나 강요와 압력과 위협은 물론이고, 수동적으로는 무시와 무관심이나 의도적인 소외시킴으로도 나타난다. ‘왕따’의 문제는 인종과 나이와 계층에 관계없이 심각하다.

전문가들은 폭력을 사회적 현상으로 9가지로 나누는데, 신체적 폭력, 성적 폭력, 감정적 폭력, 심리적 폭력, 영적 폭력, 문화적 폭력, 언어학대, 경제적 학대와, 무시 등으로 구별한다. 또한 그 대상에 따라서 아동학대, 청소년폭력, 부부 사이의 폭력, 부모와 자녀간의 폭력, 성적학대, 노인학대, 동료들 사이의 폭력, 타깃을 설정하고 집중공격하는 등 그 종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어떤 폭력도 미화되지 않는다.

성경은 폭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실까? 구약에 보면 여러 가지 폭력에 관한 기록들이 나온다.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것은 가나안 정복할 때 ‘살아서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말라’(신20:16-18)는 명령이다. 아말렉 멸절 명령, 미디안 전쟁, 여리고의 점령 등에서 하신 명령을 문제 삼기도 한다. 집단학살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는 부르는 표현을 통해서 성경의 폭력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예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신 모습이나 요한계시록의 전쟁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폭력적이라고 곡해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여리고성의 점령에서 성경은 그 전쟁의 의미를 거룩한 전쟁,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요즈음 이슬람 테러분자들이 주장하는 지하드와는 다르다. 구약의 모든 전쟁은 아니지만 여리고 전쟁을 위시한 많은 전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전쟁의 개념이 있다. 여리고성은 가나안 사람들의 죄를 심판하는 전쟁으로 상징적으로 그리고 예표적으로 모든 것이 ‘바침’이 되었다. 모든 것이 제물이 되었다. 다 제물이 되었고, 또한 제물에 손을 댄 아간 역시 ‘바침’이 되어서 죽게 된다.

Robert G. Clouse는 저서 War: Four Christian Views에서 전쟁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네 가지 관점을 묘사한다. 1)전쟁반대론, 혹은 평화론pacifism 2)무저항주의non-resistance, 3)정당한 전쟁the just war 그리고 4)성전the crusade이다. 우리는 폭력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성경은 불의한 탐욕으로 인한 전쟁을 지지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쓰셨던 바벨론과 앗수르가 행한 과도한 폭력을 대하여도 징치하신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성경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으신다. 가정폭력이나 개인폭력은 말할 것이 없다. 물론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공의로운 전쟁을 허락하셨다. 때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또한 사회적인 폭력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권세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하셨다(롬13:1-4). 인생에서 폭력은 일어나지만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한 거룩한 심판과 우리의 자신의 욕심과 죄에 의한 폭력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심판의 개념이 폭력처럼 표현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성경의 심판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폭력적인 분이 아니시다. 사단이 폭력적이다. 범죄한 인생이 폭력적이다. 최초의 폭력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다. 죄의 결과로 폭력이 사망이 표출된다.

그래서 성경은 폭력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죄를 엄중히 다루셨다. Clouse 교수는 물리적인 폭력에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 마음의 폭력이라고 했다. 성경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레19:17) 명하셨다. 예수님은 마음의 분노와 비난도 지적하셨다(마5:21-22). 사실 물리적인 폭력으로 상처 입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폭력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것 같다. 성경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그 폭력이 바로 하나님에 의하여 내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성경의 방법은 다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메시지는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자신의 평화적인 의도를 분명히 보이셨다. 예수님의 생애의 메시지는 비폭력적이었다. 아니 적극적인 사랑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 이 모든 것들은 폭력적인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이었다.

원수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 베드로는 검을 들어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앞장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다. 폭력을 행하는 자들을 향한 방어적인 폭력이다. 하지만 주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시면서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역사적으로 폭력으로 검을 든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 폭력적인 죽음을 당한다. 주님은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 부활 승천이전에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다. 주님이 주신 그 마지막 기적의 마지막 메시지는 놀랍게도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 이었다. 그리고 ‘이것까지 참는’ 길을 걸어가신다. 십자가 이전의 불의한 재판과 폭력과 학대를 참으셨다. 십자가 위에서도 못박는 원수들과 배반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이것까지 참으라’셨다. 부활 후에 배반한 모든 제자들을 다시 회복시키신다.

물론 주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우리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사단이 우리를 조롱하고 그 진리를 인용하면서 핍박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잖아 하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공격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지혜와 순결함의 균형이 필요하다. 어차피 마지막 시대는 폭력의 시대이니까 라고 폭력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폭력이 충만한 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의 삶의 현장에서 평화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의 복음을 가지고 평화의 도구로 사용받기를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있어야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메일:revdavid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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