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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들의 시선, 우리의 시선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우리 주변에도 무슬림들이 부쩍 많아졌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무슬림은 어떠한가? 그들은 공항이나 어느 검색대에서든지 주목을 받는다. 우리 눈에 비치는 무슬림들은 과격한 테러리스트, 일부 다처주의자, 여성을 핍박하는 인권유린자들로 연상된다. 반대로 무슬림의 눈에 비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떠할까? 내가 살아온 짧은 세월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가치관들이 충돌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세계는 지각변동을 하고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다. 또한 종교적 신념의 대립은 갈수록 첨예화 되었다. 특별히 이슬람권이 오일머니로 재정적인 힘을 얻으면서 그들의 부를 기초로 한 적극적인 이슬람 부흥을 위한 급진적인 포교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무슬림들이 관심을 갖는 ‘이슬람 부흥’은 이슬람 세계관과 교리로 전세계적으로 문화를 바꾸고, 정치시스템을 바꾸고, 그리고 개인적인 윤리를 바꾸고, 이슬람 세계관을 전파하고 구현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조직적이고 무섭기까지 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아랍권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모로코에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고, 북쪽으로 유럽을 공략하고, 서쪽으로는 스페인과 미국,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확산시키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체계나 생활양식이나 서방세계의 물질주의 그리고 성적혼란 등에 대한 견해 차이에 대해서 좌시하지 않는다. 과격하고도 엄격한 법을 시행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많은 서방세계의 악을 기독교와 연결시키고 또한 기독교를 향한 적대심도 숨김없이 표출하고 있다. 이슬람권 나라 안에 있는 교회들이 공격을 당하고 서방과 기독교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향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여자 중학생 200여명을 납치하고 노예로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서방교육을 악하다고 주장하는 보코하람의 악한 테러로부터, 시리아와 이라크 내부의 군사적인 힘으로 장악하려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반군들, 무슬림 형제단의 이집트 콥틱교회 공격, 인도네시아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폭력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기독교를 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결코 우호적이 아니다.

아랍권은 오트만 제국의 멸망과 함께 어려움을 겪어왔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들에서도 참패를 계속했다. 특별히 그들이 세 번째 성지로 주장하는 예루살렘 성전자리 옆에 있는 the Dome of the Rock과 그들의 Al-Aqsa 관리에도 실패했었다. 아랍권은 지난 수세기 동안 정치적 경제적 실패를 경험했다. 걸프전쟁,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기독교의 공격으로 보기도 한다. 아랍권은 시민들의 권리 행사나 평균수입, 교육, 사회봉사, 기술, 민주주의 참여, 심지어는 나라와 개인의 안전까지 개발도상국보다 더 하위에 머무르고 있다. 시민봉기운동인 아랍의 봄 자스민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부패한 정치권력을 추방하는 것은 좋지만 더 과격한 이슬람주의자들이 들어서는 위험이 있다. 그마나 기독교나 서방세계에 우호적인 얼마 안되는 나라들은 부패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이슬람주의자들의 혁명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문제는 이슬람권 특히 중동의 교회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터키는 극소수의 성도들이 남았다. 동부 터키지역의 아르메니안과 시리안 정통교회 성도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소수의 나이든 사람들이 텅빈 수도원과 교회를 돌보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1900년대 초에는 인구의 20%에서 이제는 1%로 줄게 되었다. 사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웨스트뱅크는 이제는 사라지기 바로 전 세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과 무슬림들의 양쪽의 공격 가운데서 살수 없어서 이민을 선택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의 정치역사학자인 Rashid Khalidi은 중동전문가이다. 그는 그의 저서 Resurrecting Empire에서 얼마 전까지 중동에는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동안 변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미국에 대한 노골적인 불편한 감정 심지어는 적개심이 표출되고 있다. 물론 미국인들과 미국정부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곱지 않은 시선으로 기독교인들을 보는 무슬림들을 어떻게 대하나? 우리가 중동과 이슬람 세계를 향해서 감수성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다. Charles Kimball은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감수성이 있어야 하지만 타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다원주의 세상을 대하는 데에는 3가지 패러다임이 있다. 1)inclusivism,2)exclusivism 3)pluralism이다.

첫째로, 포용적 패러다임The inclusivist paradigm이다. 주로 동방교회, 로마캐톨릭, 그리고 주류 개신교의 태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이지만 하나님의 더 넓은 은혜에 대한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나 정죄를 유보한다. 더나가서 제2 바티칸선언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해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양심이 따라 진실하게 행동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입장은 복음에 대한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감수성이다. Kenneth Cragg이나 Charles Kimball은 판단의 유보suspension of judgment를 제안한다. 특히 Cragg은 무슬림을 처음 대할 때에 신뢰관계를 형성하기까지 신학적 교리적 판단과 차이에 대한 강조를 유보하고, 토론과 판단은 신뢰가 생긴 후에 하라고 권한다.

둘째로, 배타적 패러다임The exclusivist paradigm이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역사 속에서 받아들였다. 현대에는 많은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성도들이 갖는 입장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원에 유일한 조건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Charles Kimbell은 그의 저서 Striving Together에서 이러한 접근도 역시 대화나 다른 종교에 대한 예민성을 가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대립적 적대적 태도를 갖는 Jerry Falwell, Pat Robertson, 그리고 Franklin Graham 같은 사람도 있다. 반면에 복음주의자 중에 Brother Andrew 같은 사람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Brother Andrew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굳이 말하자면 ‘열린 배타적 접근The open exclusivist paradigm’이라고 할까. 그는 자신의 경험을 Light Force: A Stirring Account of the Church Caught in the Middle East Crossfire에서 나눈다. Brother Andrew는 원래 소련과 중국에 성경을 밀수하여 복음을 증거한 God’s Smuggler라는 그의 책에서 영혼구원의 열정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이슬람권 교회들에 대한 부담을 가졌다. 그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혹은 하마스 같은 극단주의적 무슬림과 만남을 마다하지 않았다. 웨스트뱅크의 이슬람 저항운동과도 만났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슬림들을 사랑하도록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지를 남기고 성경을 남기고 무슬림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을 알게 했다고 말했다. 1993년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에서 하마스 지도자 4백명을 추방하고 산에 남겨 두었을 때에 그는 음식과 담요와 성경을 가지고 갔다. ‘원수들의 친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신뢰를 쌓은 결과 놀랍게도 이슬람지도자들은 그를 이슬람 대학과 모임에서 강의하고 복음을 소개할 수 있게 허락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타협하지 않았지만 무슬림들에게 사랑과 정직과 긍휼로 다가가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것을 제시해준다.

셋째로 다원적 패러다임The pluralist paradigm이다. 이는 앞의 다른 둘과는 매우 다르다. 다원주의적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방법으로 보지 않는다. John Hick이나 Hans Kung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고 믿는 종교적 신앙과 그 차이와 관계없이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님 혹은 신에게 간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성도들도, 대부분의 모슬림들도 수용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우리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우리가 그들을 보는 시선도 경계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기억할 것은 극단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절대 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그 극단적 이미지가 대부분의 무슬림과는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무슬림들을 두려워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순결함과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멀리 나갈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에 택시나 자동차 정비, 주유소, 많은 생활의 현장에서 무슬림을 만난다. 먼저 방긋 웃고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사랑의 제스처로 나가야 하겠다. 비록 다른 것이 많이 있지만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가 가기 싫은 니느웨로 남게 될 것이다. 라마단 기간에 선교사들과 성도들 그리고 무슬림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여는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이메일:revdavid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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