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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눈으로 본 세상

몰지각한 세계적 폭력의 시대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전세계적으로 폭력의 소식이 그치지 않는다. 지난달 미국의 워싱턴 해군기지에서 아침에 일을 시작하던 사람들이 12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거의 같은 시간 지구의 반대편 케냐의 한 쇼핑몰에서 소말리아의 무장 테러범들에 의해서 60여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백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참혹하고 몰지각한 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은 통제하려는 강력한 열망에서 나온다. 또한 자신을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괴를 목적으로 한 행동이다.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내적인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잘못 믿는 것은 폭력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에 의해 부헨발트 집단수용소에 갇혀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은 “학살은 극악의 폭력이다”이란 증언을 남겼다.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들이 어떻게 오는가? 크리스천포스트의 Jane Hunt는 폭력적인 행동의 패턴을 연구했다. 그녀는 폭력은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복적인 원인으로 온다고 주장한다. 사실 전문가들은 폭력의 생물학적, 사회적, 인지적, 그리고 상황적인 요소를 꼽고 있다.

1)폭력에는 생물학적인 요소가 있다. 정신적인 혹은 감정적인 고통은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인 반응을 하게 만든다. 두뇌의 손상이나 화학적 약물의 의존성 등은 두뇌의 정상적인 기능을 변경시킨다. 자신을 조정하는 억제의 능력을 상실함으로 폭력적이 될 수 있다.

2)폭력에는 사회적인 요소도 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경험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어릴 때나 혹은 오랜 세월 동안 폭력에 시달리면 폭력이 생활의 정상적인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폭력이 정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하지 않는다. 폭력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거나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현대의 미디어는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 폭력으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둔해진다. 소말리아의 테러분자들은 이미 군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족간의 전쟁들을 통해서 폭력 속에서 살아왔다. 이미 이들은 폭력에 무감각한 것이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3) 폭력에는 인식적인 요소도 있다. 폭력적인 사람들의 이상과 신념은 매우 독특하다. 그들은 폭력과 강제적인 힘이 갈등을 관리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폭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거칠게 대하면 전투의 투지가 왕성해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여 주지 않으면 공격과 무시를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케냐의 알카이다 난동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테러를 통해서 확장시켜야 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4) 폭력에는 상황적인 요소가 있다. 폭력

의 의도가 있어도 강력한 폭력의 도구를 쉽게 구하지 못하면 폭력의 강도는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무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상자들이 날 수 있다. 무기의 화력 정도에 따라서 폭력의 희생자의 숫자나 규모도 달라지게 된다. 워싱턴은 개인의 공격이었지만 케냐에서는 무장된 테러분자들의 조직적인 공격이었다. 전 세계적인 조직은 911과 같은 참사를 일으켰다. 때로는 조그만 불꽃이 무섭고도 거센 폭발을 가져오기도 한다.

무엇이 원인이 되었던지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간 이런 폭력들, 개인적이든지, 그룹이든지간에 폭력은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이 폭력적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하나님과 세상에 있는 폭력을 어떻게 조화하는가 질문한다. Ra’anan S. Boustan는 그의 저서 Violence, Scripture, and Textual Practice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에서 히브리성경과 신약성경의 페이지들을 통해서 폭력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Philip Jenkins 그의 저서 Dark Passages에서 Phyllis Trible의 말을 인용하여 성경은 테러로 넘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섭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평화롭고 사랑이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단이었던 Sinope의 Marcion의 주장과도 비슷하다. 여기에 반해서 Hemer 는 구약의 폭력은 실수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성경은 폭력적인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의 전환의 느리고 아프고 때로는 머뭇거리는 탈출의 이야기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Leigh Gibson와 Shelly Matthews는 그의 저서 Violence in the New Testament에서 이런 구약의 폭력에 대한 연구들에 대한 비판을 제공한다. 이런 연구들은 많은 부분에서 신약을 무시하거나 혹은 신약을 거의 주목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연구들은 신약이 구약의 폭력에 대한 해독제라고 하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성경에 폭력이 많은 것은 인간사에 폭력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 폭력이야기가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타락이후 인류의 역사상 전쟁이 없던 시대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은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남긴다. 기록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이다. 근대사만 해도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그 후에도 규모는 적지만 수많은 세계전쟁들이 있었다. 마지막 아마겟돈과 같은 종말론적인 전쟁의 가능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까지 전쟁의 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국가적 규모의 폭력도 그렇지만 작은 스케일이라고 해도 폭력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관계를 파괴한다.

성경이 말하는 최초의 폭력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폭력은 주도되어진다. 세상은 보복의 적절성을 고려하라는 인도적 요구마저 무시되고, 무한한 보복의 위협을 통해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던 라멕의 논리(창4:23-24)가 지배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폭력을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한 말씀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폭력을 미워하신다(시11:5). 여호와는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폭력을 심판하신다(시16:4). 하나님은 영적 리더들의 폭력을 금하신다(딛1:7). 감독의 자격은 구타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치리자들의 폭력을 경고하신다(겔45:9).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라 명하신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의 기도와 부르짖음을 들으신다(시10:17).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오른손으로 붙들고 도우신다(사41:13). 하나님은 그들의 가치를 아신다(눅12:6-7). 하나님은 재난 속에서도 선한 일을 행하신다(사61:1-3).

성경은 전쟁을 무조건 배제하지 않는다. 사실상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이다. 하지만 신약의 전쟁은 최종적이며 절정적인 십자가의 희생제사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최종 파루시아 때까지 천국확장을 위한 영적전쟁이다. 그것은 성도의 예배적 삶으로 수행된다. 우리의 세상은 폭력으로 금이 나고 상처를 많이 입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우리는 대답과 함께 소망을 추구한다. 미국에서도, 케냐에서도, 그리고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으로 슬퍼하고 애통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서 파괴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피해자들을 위한 탁월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예수님의 임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향한 위로를 주신다.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향한 용서를 제공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지혜, 위대함, 평화는 폭력적 행동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방향을 바꾸고 치유하게 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권능은 깊은 감정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치유하실 수 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종류의 폭력을 잠재우시고 진정한 평화를 주실 것이다. 그동안 폭력과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강도도 더해갈 것이다. 하지만 이 절정에 재림주 예수그리스도가 승리하신 만왕의 왕으로 마침내 오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폭력을 잠재우고 폭력이 없는 영원한 평강의 새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참여하자.

▲이메일:revdavid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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