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이 성경의 역사성에 대하여 도전을 해왔다. 성경에 기록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성서비평과 함께 성경을 마구 난도질해왔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의 주장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증거 한다. 그랜트 제프리 교수는 그의 저서 “The Signature of God”에서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은 성경의 기술을 전적으로 부정할 단 하나의 고고학적 발견을 제시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또한 지난 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고고학 학자인 넬슨 글렉은 그의 저서 “Rivers in the Desert”에서 “성경의 말씀을 부정하는 고고학적 발굴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성서고고학은 성경의 역사성을 증거한다.
텔 단 석비(The Tel Dan Stele)는 다윗왕국의 역사성을 증명한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의 다윗왕과 다윗왕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솔로몬이 건축한 유적들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솔로몬의 역사성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왕에 대한 직접적인 고고학적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윗이 전쟁을 하느라고 바빠서 건축공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다윗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다윗의 존재가 허구이고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1966년부터 예루살렘의 히브리 유니온대학 발굴팀이 아브라함 비란(A. Biran) 교수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북쪽의 단의 유적층을 발굴해왔다. 1993년 텔 단의 주전 9세기 유적층인 무너진 성벽 돌 틈 사이에서 깨어진 아람어 비문 조각 셋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단 석비의 중요성은 비록 그것이 고대 히브리어가 아니지만 팔레스틴에서 발굴된 기록물로서 최초로 다윗 가문(House of David)을 언급하고 있으며, 세 조각들의 보완 읽기를 통해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다윗 가문의 왕 아하시야의 이름도 확인하게 되었다. 반면에 다윗에 이어서 평화의 시대를 연 솔로몬은 각종 건축을 했고 그의 유적들은 오늘도 곳곳에 발굴된다. 솔로몬의 유적들은 전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 흩어져서 발굴되었다. 솔로몬은 3개의 군사 병거성을 짓는다(왕상9:15).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이다. 그 외에도 솔로몬이 지은 여러 도시들이 확인되었다. 솔로몬 시대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성벽과 마굿간 구조물들과 대문들을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확인했다.
1980년에는 캐태프 힌놈 은판 두루마리(Ketef Hinnom Silver Scroll)가 발견되었다. 힌놈의 골짜기를 동쪽으로 굽어보는 작은 암벽 석실 무덤 지역에서 유다 왕국 말기에서 바벨론 포로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묘를 발굴했다. 사람의 뼈와 함께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 이곳 발굴 장소의 이름을 그 지형의 위치에 따라서 “힌놈 골짜기의 어깨 등성이”란 뜻으로 히브리어 “캐태프 힌놈”이라고 부른다. 소형의 은판 두루마리 2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 주전 6세기 초의 고대 히브리어 서체의 특징을 보여주는 글자들이 발굴되었다. 은판 두루마리에는 대제사장의 축도문(민6:24-26)의 내용이 요약되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주전 2세기의 내쉬 파피루스나, 사해사본보다 그 연대가 상당히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구약 본문에 대해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랜 증거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 전시되고 있다.
주전 8세기의 제사장의 훌도 발굴되었다. 상아 석류 명문(Ivory Pomegranate Inscription) 은 높이가 5cm 정도의 상아로 만든 석류 모양의 장식품이다. 석류 장식 밑바닥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있어서 여기에 자루를 끼워 예식 때에 제사장들의 홀(scepter)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류 장식의 목 아래 어깨 둘레에는 주전 8세기의 서체로 감정되는 고대 히브리어 명문이 ‘(여호와의 전)에 속함. 제사장들의 성물’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상아 석류 명문은 1979년 골동품상에 나왔던 것이 프랑스의 고문자학 학자인 앙드레 르메르가 그 가치를 발견했다. 지금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된 석류 장식품이 솔로몬 성전시대 제사장들이 사용한 물품으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것이다.
여리고 성벽의 발굴은 성서의 역사가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한지를 확인시켜준다. 여호수아 6:20의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복할 때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말씀은 비판과 도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리고를 발굴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성벽이 밖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여리고 성벽은 이중의 벽으로 약 12-15피트의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이 밖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군대가 그 무너진 벽을 딛고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여호수아 6:24은 여리고성을 정복시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라고 기록되어있다. 여리고의 동쪽을 발굴해보면 도시의 부분 부분에 불에 탄 흔적들과 잔해들이 3피트 정도 두께로 쌓여 있음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그 층에서 발굴된 항아리에는 곡식으로 가득차 있음도 발견되었다. 성경 말씀처럼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멸망한 것을 보여준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사해 사본들을 빼 놓을 수 없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구약의 사본은 주후 10세기의 사본이었다.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온갖 억측과 비판이 있었다. 1947년부터 1956년에 이르기까지 사해부근의 쿰란의 거주지 근처에서 수많은 고대사본들이 발굴되었다. 양피지에 기록된 사본들은 주전 200년부터 주후 70년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것들이다. 사본은 4만개에 이르는 고대사본, 하박국과 미가서 성경주석, 쿰란 생활 자체에 대해 기록해 놓은 문서 등이 발견되었다. 800개 사본을 감정한 결과 170개 사본은 에스더를 제외한 구약 전편이 발굴되고, 특별히 이사야서는 완전한 사본이 발굴되었다.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희랍어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사본들이 발굴이 되었다. 사해사본은 현재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이 너무도 놀랍도록 정확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본디오 빌라도의 비석의 발굴은 신약성경의 역사성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마27장의 본디오 빌라도의 역사적 실존에 대하여서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예수님께 사형을 선도한 빌라도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해왔다. 성경 밖에서 다른 자료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1년까지 32인치된 대리석 비석이 발굴되었다. 가이사라 원형극장에서 계단 좌석에서 빌라도 비석이 발굴됨으로 빌라도의 이름과 직책과 통치 지역과 누구를 위해서 지었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의 역사성이 2000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십자가형의 역사성도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심했다. 십자가형의 방법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었다. 십자가형은 노예들이나 반란자에 대한 극형이었다. 저주받은 사람은 나무에 못으로 박히거나 묶어서 죽을 때까지 매달아서 두었다. 성경은 십자가형벌을 마27장에서 자세하게 묘사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십가형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1968년도에 유대인의 무덤동굴에서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람의 잔해가 발굴되었다. 십자가형에 사용되었던 못은 죽은 사람의 뼈에 박혀있는 그대로 발견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형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집트에서도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발견들이 여럿이 있다. 특히 야웨 비문은 출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다. 주전 14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비문은 이집트의 아멘호텝 3세 시대의 것으로 지금의 수단인 소렙에서 발굴되었다.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로 보이는 무리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이집트에 있는 메넵타 비석은 1896년 이집트의 서부 테베에서 발굴되었다. 이는 성경 밖에서 이스라엘이 언급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주전 1210년에 기록된 이 돌비는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이집트의 이스라엘 침공을 증명하는 부조가 카르낙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바로 시삭의 군사적 공격을 기록하는 과정에 주전 925년의 이스라엘 침공의 사실도 부조로 새겨져 있다(왕상14:25). 애굽의 신 아문의 큰 형상과 함께 이스라엘 므깃도도 그가 공격한 도시 중에 하나로 새겨있다.
뿐만 아니라 아합왕에 대한 기록도 발굴되었다. Kurkh Monolith라고 불리우는 오벨리스크는 1862년 터키의 Kurkh에서 발견되었다. 주전 850년경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해독을 한 결과 성경에 자주 언급되어진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물이다. 아합왕의 역사성도 증명되었다. 아합왕은 비단 이 비문뿐 아니라 사마리아 궁전 등 여러 건축물들이 발굴되었다. 살만에셀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도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성을 증거한다. 9세기 앗수르에 의해서 만들어진 비석은 검은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상형문자로 열왕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들인 에후와 오므리가 등장한다. 에후처럼 보이는 이스라엘 왕이 앗수르 왕에게 절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1846년에 발굴되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경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발견들은 많이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는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주님의 사랑은 마지막 시대에 말없이 땅에 감추어진 돌들을 사용하신다. 믿지도 않고 고백하지 않는 강퍅한 인생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성경의 무오성을 돌들이 소리지르고 있다. ▲이메일:revdavidkim@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