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딸인 성은 양의 소극적 안락사 문제로 인해서 한국과 미국에 또 한번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3면, 제1404호 10면 참조).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라고해도 부모의 입장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같은 목회자의 가정과 자녀가 겪는 고통이 결단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치유의 손길로 치유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성경은 안락사에 대해 분명한 말씀을 하고 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안락사는 다 같은 안락사가 아니다. 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안락사는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그 구분의 방법도 다양하다.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자의적 안락사, 비임의적 안락사와, 타의적 안락사로 나눈다. 또한 행위자의 행위에 따라서 소극적 안락사, 간접적 안락사, 적극적 안락사로 부른다. 생존의 윤리성에 따라서 자비적 안락사, 존엄적 안락사로 나눈다.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것은 적극적 안락사이다. 오늘날 미국 전역에서 법정과 입법부 회기 동안 자주 토론되고 있는 안락사의 유형이다. 많은 교회와 보수와 복음주의적 리더들이 적극적 안락사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자유적인 교회들은 허용하는 편이다. 적극적 안락사의 옹호자들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주장한다. 또한 안락사가 고통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무고한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일 수 있는 도덕적 권한이 없다. 생명의 존엄성을 믿는다면 가족들과 사회가 감당해야 할 경제적 짐도 쉽게 정리된다. 한 사람의 생명에는 어떤 가격표도 붙일 수 없다.
또 보통 안락사라고 지칭할 때는 ‘비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비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는 음식이나 공기나 물과 같이 인간 생명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시행한다. 이런 필수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살인에 해당한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환자가 질병으로 고통 받는 기간 동안 가능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진정제나 다른 수단을 제공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잠31:6-7).
다른 안락사들과 조금 다른 것이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이다. 이는 기계적인 장치나 다른 인위적인 수단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환자가 자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적극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자연적인 소극적 안락사는 생명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적으로 죽음이 찾아오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라고 해도 심장과 다른 기관들이 건장한 의식불명의 환자들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코마상태에서 의식이 회복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한 사람마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현대의학은 보통 뇌파의 정지를 뇌사, 죽음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심장의 정지를 죽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 대중은 안락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놀랍게도 안락사나 존엄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림대법학부 이인영 교수가 2003년 성인 1020명을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10명 가운데 7명은 불치병 환자가 죽을 권리를 요구할 경우 의료진이 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에 동의했다. 갤럽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들도 생명보조장치를 하고 있는 말기환자에 대해서는 86%가, 고통 중에 있는 보통 말기에게는 55%가 소극적 안락사와 ‘죽을 권리’를 지지한다. 어떻게 계산을 해보아도 조건부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보다 많은 형편이다. 주별로 보면 오리건 주는 법적으로 허락하고, 그 외에도 텍사스, 몬타나, 워싱턴 주에서 허락한 경우들이 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다양하다. 1)누구든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 2)헌법상의 사생활권에는 존엄한 죽음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3)안락사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4)안락사는 가족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한다. 5)안락사는 환자가족의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 6)안락사는 사회의 무거운 부담을 덜어준다.
하지만 안락사를 반대하는 주장도 분명하다. 1)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2)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아무도 파괴할 수 없다. 3)안락사는 가족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4)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다. 5)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파괴한다.
안락사가 합법화되고 포괄적으로 수용될 때에 일어나는 사회적인 악용의 가능성은 심각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나치독일은 진화를 확고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소위 안락사라는 형태로 사회진화론이 집행되었다. 처음에는 불치병자에게, 다음으로는 장애인과 노인들에게, 그리고 결국 600만 명의 유대인과 집시 등의 소수민족에게 살인이 행해졌다. 그들의 논리는 ‘사회의 부담’이 된다는 명목이었다. 만약에 안락사가 합법화되면, 사회는 죽음을 단지 권리라 여기는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안락사를 처방으로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비단 나치독일 뿐 아니라 죄악된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 먼저 성경에 나온 안락사의 예들을 살펴보자. 아비멜렉이 베데스에서 망대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려다가 한 여인이 떨어뜨린 돌에 맞아 두골이 깨어졌다. 그는 여인에게서 죽었다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부하에게 자신을 칼로 찌르게 했다(삿9:53,54; 삼하1:6-10). 고대판 안락사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의 불명예스러움과 육체적 고통을 단축하기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또 하나의 범죄 곧 살인을 하였다.
사울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이미 활에 맞아 중상을 입어 도망갈 수 없음을 알고 표로로 잡혀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칼을 빼어 자결하였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도와주었던 행위를 자비로운 것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다. 다윗은 오히려 그 아말렉 사람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삼하1:13-16).
성경은 안락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창1:26,27; 9:6). 그래서 살인을 한 경우 외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을 거두실 권한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창9:6). 안락사가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2:7; 시21:4; 36:9; 행17:25).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신32:39; 삼상 2:6,7; 시68:20).
하나님은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다른 계명에는 목적어가 나오는데 왜 여기에는 그것이 생략되었을까?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까지도 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제6계명에서 생략된 목적어는 ‘타인과 자신’ 일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자 노르만 L. 가이슬러는 안락사의 반대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1)안락사는 생명에 대한 주권과 모순된다. 2)안락사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거역한다. 3)안락사는 자살 또는 살인의 한 형태이다. 4)성경은 안락사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5)안락사는 인도주의적인 윤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6)안락사는 가족과 사회를 죄인으로 만들어낸다. 7)안락사는 낙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안락사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행20:28; 고전6:19,20; 7:23; 벧전2:9).
안락사 논쟁보다도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당한 가정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위로가 넘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성은이가 완쾌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생명이 생명의 주에게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