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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눈으로 본 세상

분노의 계절에서 승리하려면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혜천 목사

지난 2일 우리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미국 오클랜드에 한국인이 설립한 오이코스 대학에서 총기 난사사건이 일어났다. 그 결과 7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다. 얼마 전 아틀란타 사우나 살인사건은 한인이 한인을 향하여 총을 난사해서 5명이 죽었다. 또 2007년 버지니아텍에서 발생한 조승희의 총기난사는 미 역사상 최악의 캠퍼스 폭력사건이었다.

40대의 용의자인 고 씨는 이 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했다가 몇개월 전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최근에 들어서 어려움을 많이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에 어머니를 잃고 동생도 교통사고로 잃고 아버지와는 따로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와도 이혼을 했다고 한다. 정말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의 사태를 주시해보아야 하겠지만 이번에도 미국 언론이나 미국인들의 반응은 매우 성숙하다. 한인에 대한 인종적 공격이나 질타는 없다. 단지 총기 허가에 대한 이슈를 더욱 정치적으로 쟁점화해가는 분위기이다.

어떻게 신학대학이 있는 학교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학교이름인 오이코스의 의미는 집, 가정, 가족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가정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번 사건도 물론 미리 짐작할 필요는 없지만 오클랜드 경찰은 고 씨가 간호대에 다니다가 퇴학당한 것에 격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미움과 격분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분노가 무엇인가? 분노는 사실상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이다. 신체적인 위험이나 고통에 대하여 반응하는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이나, 자아,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분노는 부적절한 것이다. 분노는 상처를 입었을 때 나타난다. 성경이 어떤 경우는 분노를 정당화하는 것 같고, 어떤 곳에서는 분노를 금지되어져 있어 혼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모든 분노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분노가 다 좋은 것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분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의로운 분노와 의롭지 못한 분노다. 첫째로, 의로운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공의롭고 정당하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과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지만 감정적이지 않으시다.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이지도 않다. 내편이니까 무조건 봐주는 눈 감고 지나가는 것도 아닌, 사랑을 근거로 하시는 의로우신 분노이다.

사람의 분노 가운데서도 정당한 분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주의를 요한다. 세상 사람들도 정당한 분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분노를 표출한다. 부정과 부패에 대한 의분이 있다. 그러나 소위 세상 사람들의 정의는 눈에 보일 때는 정당한 것 같아도 그 안에는 음모와 자기주장과 자기 이권과 자기 권세를 위한 잘못된 동기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노는 정당하게는 보이나 사실은 잘못된 분노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있는 분노는 오직 하나님을 위한 분노이다. 죄에 대한 분노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정당한 분노이다(출 32:19-20). 사탄의 역사를 볼 때, 불의가 성행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들이 행하여질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분노들 역시 엡4:26-27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둘째로, 대부분 사람들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는 분노이다. 매우 파괴적이며 잘못된 원인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물론, 분노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외부적인 혹은 내부적인 원인에 의하여 일어난다. 우리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사건이나 혹은 현재나 장래의 일에 대한 염려들을 통해서 분노하게 된다. 과거의 어떤 아픈 상처들이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기억들이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분노는 두 번째 감정이라고 불리운다. 분노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맨 처음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다른 감정이 먼저 느껴지고 그 처음 느끼는 감정이 우리에게 불편해지면 마침내 화를 내게 된다.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는 감정들을 보고 분노를 앞서는 감정들이라고 부른다. 분노를 일으키는 것들은 보통 두려움이나, 실망, 창피를 당하였을 때, 죄책감을 가질 때, 질투심, 자기가 부적당함을 느낄 때, 아픔이 있을 때, 때로는 피곤하거나 배고픔이 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내가 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분노를 냄으로서 내가 강하다고 하는 것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있고 강하면 여유가 생긴다. 화를 계속 내는 것은 약함이나 아픔이 있다는 말이 된다.

분노의 단계는 가인의 살인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신다. 분노는 통제되지 않으면 점점 악화된다. 분노를 억제하지 않고 그 감정에 부채질을 한다면 점점 더 정도를 더해간다. 더 정도가 지나치면 분개에서 격노로 바뀐다. 점점 더 노가 격하게 되어 격분한다. 격분은 폭력이 나오고 감정적인 통제력이 상실된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려하게 되고 포악한 폭력이 나온다. 더 나아가면 광분의 단계로 나간다. 광분하게 되면 파괴적인 행동들이 지나쳐서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가인과 같은 자기의 동생을 죽이는 살인행위로 나간다.

왜 분노가 발전되는가? 분노는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분노는 자동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분노는 축적이 되고 나중에는 형태나 모양을 바꾸어서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게 된다. 건강을 해치고 정신적 건강도 상하게 된다. 분노는 영적인 문제이고 심지어는 살인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엡4:26-27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하셨다. 첫째로, 분노는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이다. 사실 분노는 자연적인 사람의 감정이다. ‘분을 내어도’ 라는 말씀은 분노가 허락되었음을 말한다. 분노는 하나의 신호와도 같은데 무엇인가 잘못되어지는 것 같은 것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분노 그 자체가 반드시 죄악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다. 그러나 죄를 짓지는 않으셨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노를 하셨다. 우리가 분노를 하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분노를 잘 통제하지 못한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품으면 죄이다.

따라서 분노에는 한계와 제한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두 가지 한계를 말씀하신다. 먼저, 분노에는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시간적으로는 분노를 해가 지도록 까지 지속시켜서는 안된다 하셨다. 즉, 지속적으로 분노를 품지 말라는 말씀이다. 두 번째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정도의 한계이다. 분노를 품되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할 정도만 품으라는 것이다. 분노는 용서로 사랑으로 이해로 바꾸어져야 한다. 분노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가 약해진다. 마귀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할 틈을 주게 된다. 분노에 이끌리고 마음으로 죄를 짓고 행동으로 죄를 옮기고 결국은 망하게 된다. 성경은 잘못된 분노를 극복하려면 첫째로 분노의 원인을 고치라 하셨다. 우리는 분노 그 자체에 집중하여서 사실을 화를 내게 하는 그 원래의 원인을 무시하는 수가 있다. 둘째로, 잘못된 분노를 극복하려면 분노의 대상을 바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분노의 대상은 사탄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죄에 대한 것이다. 분노의 대상이 아닌 것은 내가 상대하는 사람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죄와 죄를 짓게 하는 사탄의 역사를 미워해도, 죄를 짓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주의함이 필요하다. 셋째로, 분노의 계절을 극복하려면 분노의 순간에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성령님께 순종해야 한다.

분노의 계절은 분노 속에서 사는 것이다. 분노의 계절은 하나님과의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의 부재에서 온다. 분노에 젖어서 밤낮을 사는 것은 죄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무력하게 하고 비극을 가져오는 구멍이다. 온 세상에 소용돌이치는 이 분노의 계절에서 나의 영적인 상태는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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