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혜천 목사
2012년 새해도 지나고 이제는 구정을 맞게 되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우리는 복을 많이 좋아한다. 그래서 복이란 글자를 새해가 시작할 때 대문에 붙여 놓는다. 매일 사용하는 숫가락에, 젓가락에, 베개에, 이불과 요에, 기둥에, 지붕에 복을 새겨 놓는다.
그렇다면 복이 무엇인가?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다. 초등학생들에게 5복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더니 대답은 초복, 중복, 말복, 8.15 광복, 9.28수복이라고 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주로 사서삼경의 서경에 있는 오복을 말한다. 오복은 1)수:오래 사는 것 2)부:부자가 되는 것 3)강녕:건강한 것 4)유호덕:남에게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는 것 5)고종명:천수를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 구전되어온 5복은 장수, 부자, 건강, 자손, 치아가 튼튼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 가운데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이 교회 안팎에서 매우 강하다. 이런 문제는 일단 교회의 영적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현세적인 복을 갈망하는 모습으로 비친 것은 우리가 회개할 문제이다. 물론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토양과도 연결되어 있다. 한국인의 정신적 토양은 샤머니즘과 불교와 유교의 토양 위에 기독교가 전래됐다. 기복신앙은 복음으로 정신적인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타협된 부분이다.
합동신학교의 송인규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져 드는 요인으로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들었다. 둘째, 한국인의 전통 문화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샤머니즘 배경의 지대한 영향을 지적한다. 우리의 무교적 세계관은 길흉화복에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는 일을 삶에 있어 초미의 관심사로 삼게 만들었다. 셋째, 성경의 복사상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이 복에 대한 광적 집착현상을 낳았다. 구약에 빈번히 등장하는 복의 의미를 곡해하고 또 잘못 적용해온 데서 문제의 핵심을 찾는다. 송 교수는 한국의 성도들은 중첩된 세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기복신앙의 수호자와 전파자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복음전도의 구호처럼 됐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면 복받는다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아니 예수를 믿어야만 복을 받는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복으로 가득차 있다. 어떤 분은 성경에 만 가지 이상의 복을 약속하고 있다고 했다. 성경에 복으로 사용된 단어들을 보면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한다.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헬라어 ‘율로기아’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선이나 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비해 마카리오스(makavrio)는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복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선의(善意, good will)로서 영적 물질적 은택을 통하여 나타나고 또 그로 인해 향유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은 성경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처음 주신 것이 복이다(창1:28).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복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된다(창12:1-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주심의 약속을 믿고 순종한다. 그 복은 이삭(창26장) 과 야곱(창28장)과 요셉에게도 계속해서 내려간다. 족장시대의 족장의 가장 중요한 사명중의 하나는 제사장의 사명처럼 자녀들을 복주는 것이었다. 창세기의 시작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시작하고(창1:22, 28), 창세기의 마지막은 야곱이 모든 자녀들에게 하는 예언적 축복(창49장)으로 끝난다. 신명기는 순종하면 복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 내림을 강조한다. 구약의 마지막책인 말라기는 십일조를 통해서 주시는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을 약속하신다. 예수님도 복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사모할 것을 명령하셨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복으로 시작해서(계1:3) 복으로 끝난다(계22:7, 14).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복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계22:7).
따라서 성경의 복은 엄청나다. 우리가 사모하고 또 사모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고 믿는다. 하나님의 복을 무시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의 복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큰 죄이다.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단 일초도 살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주고 싶어하시는 그 복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신앙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복은 무엇인가? 먼저 성경적인 복은 총체적인 복이다. 성경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고 중에 하나가 아니다. 영적인 복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육적인 복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받은 복뿐 아니라, 현재의 복, 미래와 아니 영원한 세계의 복도 포함한다. 영육의 복이다. 모든 신령한 복과 모든 육신의 생활의 복이다. 다 포함한다. 한 순간이 아니고 한 영역이 아니고 삶의 전체에 미치는 복이다. 아니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다 복이고 또한 좋은 것이다.
또한 성경적인 복은 내가 갖고자 하는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복을 주시는 그 분, 하나님이 강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을 조건이나 환경이나 상태로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오복의 개념도 그러하다. 내가 받기 원하는 것이나, 받아누리고 있는 상태에 초점을 맞추면 기복신앙이다. 하지만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성경적인 복이다. 세상의 5복이 아니라 모든 복을 다 누려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결단코 복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적인 복의 불행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예수를 믿으면 그것이 복이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여도 복이고, 가난해도 복이다. 우리는 복을 주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무엇이 있든지 없든지 초월하여서 복된 생활을 누린다.
또한 성경적인 복은 예수 안에 있는 복이다. 최고의 축복되신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임마누엘이라고 했다. 임마누엘이 최고의 복이다. 하나님과 동행함이 복이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된 것도 임마누엘이다. 성경은 다윗의 지속적인 승리도 임마누엘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것이 복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고 누리는 것들은 하나님의 복의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엡1:3에서 복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복이 있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셨다고 하셨다. 우리의 복은 지금 없어서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신 복이다. 이미 소유한 복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복은 이미 주신 것으로 누리게 된다.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더하여 주시는 복도 약속하셨다.
또한 성경적인 복은 예수를 믿고 모신 내가 잘 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예수를 믿은 내가 복의 근원으로 다른 사람을 복주는 것이 참 복이다. 아담을 복주신 것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도 다 같은 이유이다.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한 것이다.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성경적인 복의 확장의 시작이다. 사실 복의 근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 하셨다. 아담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복을 받고, 아브라함 때문에 모든 열방과 민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 가능하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바로 열방이 우리로 인하여 복을 누리도록 섬기는 것이다.
새해를 보는 세계의 전망이 밝지 않다. 북한과 이란의 사태들로부터 연초부터 온 세계가 시끄럽다. 특별히 새해를 맞아 재정압박의 계절을 지나는 모든 분들이 말라기에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삶의 모든 현장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심’ 을 받기를 축복한다.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은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되는 쓰임받는 귀한 도구가 되기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