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혜천 목사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 개인도 어렵고, 가정들도 어렵고, 회사들도 어렵고, 나라 경제도 어렵다. 잘살던 나라들이 휘청거린다. 성도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고, 교회들도 역시 어렵다. 지금 미국의 월스트리트 앞에서 몇 달째 계속되는 데모나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어지는 금융가 앞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데모는 빈부의 격차에 대한 항의이다. 불과 1%의 사람들이 부를 좌지우지하는 부조리에 대한 항의이다. 우리들의 경험하는 어려움이 우리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종교성과 경제적 불평등과 관계된 몇 가지 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토빈 그란트는 크리스처니티투데이에 실린 “Religion and Inequality God Hand-in-Hand” 글을 통해서 종교성과 빈부차의 관계를 보고했다. 최신 자료들을 분석한 바에 의하면 종교성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나라가 더 부유해지고 잘살게 되어지면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들보다 더 세속적인 사회로 바꾸어져 간다.
하버드 대학의 Pippa Norris와 미시건대의 Ronald Inglehart의 공저 “Sacred and Secular”에서 물질적 불안정과 종교성의 상관관계를 보고했다. 사람들은 생의 위기를 경험할 때에 더 종교적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나라들은 더 종교적이고, 부유한 나라들은 더 세속화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개발되어지는 나라에서의 종교성은 살기가 좋아짐에 따라서 더욱 약해진다. 중국과 베트남이 현대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의 교회도 다른 이유들이 있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번영과 함께 마이너스 성장으로 내려가는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외적으로 미국은 가장 잘 사는 나라이면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반대로 가는 것 같은 미국을 보면서 의아해 한다. 최근에 보고된 일련의 조사들은 미국에 빈부의 격차가 매우 심각함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온 세계가 빈부의 격차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미 UN 에서도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빈부의 격차에 대한 경고를 한 적이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를 보면, 미국인구의 90%는 1년 가계수입이 평균 31,244달러인데 비해 상위권 10%는 164,647달러나 되고, 그 중에서 가장 상위권의 1%는 무려 연평균 110만달러 이상을 벌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미국인의 종교성을 빈부의 격차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사실 미국은 경제적 불평등이란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부끄럽다. 미국은 다른 서방 세계의 나라들보다 더욱 불평등 사회이다. 미국은 136개국에서 39번째로 불평등한 나라이다. 이 숫자는 우간다, 자메이카, 카메룬과 비슷하다. 말리나 캄보디아 같은 나라가 미국보다 더 평등한 나라이다. 다른 서방 나라들 캐나다는 101위, 유럽은 111위, 스웨덴이 가장 평등한 나라라고 한다.
그렇다면 불평등 가운데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성이 강한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불평등 사회에서의 부유한 사람들도 종교성이 강하다. 종교는 자신의 향상된 위치를 정당화 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평등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더 종교성이 강하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부자들도 역시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담은 노틀담대의 David Campbell과 하버드대의 Robert Putnam의 공저인 “American Grace”에서 종교는 교육과 부유함과 별 관계가 없음을 보고했다. 그들은 미국인의 수입과 교회 출석과 관계가 없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대학졸업자들이 고졸자들보다 교회 출석율이 더 높다. 지난 30년간 빈부의 차는 더 증가되었는데 미국의 고졸자들의 교회 출석율은 감소된 반면에 대학졸업자들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들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항상 바르지는 않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종교성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어려움의 계절을 잘 살아가야 하나?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려움의 계절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는 경제적 불평등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나누어 주는 생활’을 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주시는 분 the Giver 이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독생자를 주셨으니’ 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묘사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주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나누어 줄 때에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기쁘고, 행복함을 경험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취하는 분 the Taker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로 취하는 자의 생활을 하게 한다. 변화되기 전의 야곱이 경험했던 삭막한 인생을 살게 된다.
John Avanzinis는 그의 저서 “In Rich God Poor God”에서 여호와 이래는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넘치게 주시는 부유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솔로몬에게 엄청난 부를 주신 분이시다. 이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엄청난 부요함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다윗처럼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한다. 양은 목자가 있을 때에 부족함이 없다. 내가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청지기의 사명은 여호와이레를 믿는 성도들만이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충격적인 사실은 진정한 하나님의 청지기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나누어주는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넘치게 약속하신 풍성하심의 성취를 누리는 생활을 산다. 우리가 부요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그것은 주는 생활, 나누는 생활, 씨를 뿌리는 생활, 신실한 청지기 생활을 살면서 풍성하게 경험한다.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시기에 또한 가난한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주님은 마지막 시대의 증상은 가난이 만연할 것이라 하셨다. 가뭄, 기근, 지진, 질병, 자연적 재해 등 모두 가난과 관계되어진다. 또한 신앙 때문에 오는 가난도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생활도 예수를 주로 믿기 때문에 가난을 선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님을 믿기 위하여 카타콤에서 평생을 어두움에서 지내는 것도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천막 만드는 직업을 돈을 벌기 보다는 복음의 증진이 더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 성도는 가난하게 되거나 부요하게 되거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들은 부요한 자가 되었던지 아니면 가난을 경험하던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자신이 어려움의 계절에 살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하여 둔감하여지기 쉽다. 나의 가정이 어려우니 교회에 대한 헌신과 헌금도 인색해 지기 쉽다.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멀리 선교의 현장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쉽다. 옥합을 깨는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하는 제자들에게 마리아를 옹호해 주시던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거니와” 하셨다. 물론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항상 우리 주변에 있으니까 하고 무관심 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역설적으로 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보이라’는 뜻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나보다 더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두심으로 우리의 하나님 사랑을 항상 테스트 하신다는 의미는 아닐까?
비록 우리가 상위권 1% 수입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찌라도 미국이나 한국의 가난은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해 보면 절대 부유함이다. 진정한 축복된 생활은 상대적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평보다는 감사의 생활이다. 나눔의 생활이다.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주신 부유한 자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들을 “복의 근원”으로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진정한 복의 근원이시에 우리도 복의 근원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여호와 이레의 부유한자의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은 아닐까? 연말을 맞이하여 풍성한 감사, 큰 소리의 감사, 긴 감사, 성전에 이어지는 감사를 통해 큰 나눔, 적은 나눔의 생활이 나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지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