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혜천 목사
현대인의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은 무례함 혹은 공격적인 태도이다. 전쟁과 냉전시대의 최고의 가치는 승리이었지만, 지금의 최고의 가치는 평화이다. 글로벌시대의 다원화된 사회는 공존할 수 있는 길인 관용(tolerance)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성경의 복음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종교와의 타협의 장으로 나오라고 요구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소통을 강조하고 함께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현대의 미덕이고 가치관이다.
정말로 예수님의 복음이 무례하고, 화나게 하고, 공격적인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복음의 공격성에 대한 비판의 근본적인 문제는 복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강퍅함이 우리의 부패함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도리어 강력하게 공격을 받는다. 하나님이 사랑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복음이 공격적이거나, 무례하거나, 불쾌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바라는 진정한 종교는 모든 사람들을 다 수용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 받지 않고 다 구원을 얻는 종교를 원한다. 따라서 죄에 대한 지적이나 하나님의 진노나 지옥은 가르침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는 통하기 때문에 무엇을 믿어도 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도 그 독특성과 유일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럼에도 복음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는 ‘thanks but no thanks’이다. 사람들은 ‘구원 받으세요’ 하면 먼저 모독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화를 낸다. 사실 복음은 좋은 방향이든지 나쁜 방향이든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도 말씀을 증거하실 때 사람들을 불편케 만드실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치유와 능력을 행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던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니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쳐서 죽이려고 했다(요8:31-59).
복음은 본질상 공격적이다. 복음은 논란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복음은 듣는 사람의 가장 깊은 문제, 가장 감추고 싶은 문제, 말하고 싶지 않는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면 어둠의 세계는 변화와 요동함이 생긴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더욱 더 공격적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또한 핍박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수많은 핍박을 받고 사슬에 매이고 감옥에 갇히고 마침내 순교한다.
복음은 배타적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는 복음은 뉴에이지에 젖은 이 세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다. 복음은 본질상 구도자가 듣기 쉬운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덤과 부활을 증거한다. 복음은 인간이 구제 불능의 죄인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말한다. 듣기 좋은, 안락하고 평안한 메시지가 아니다. 하지만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 신앙에서 제거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예수님도 남지 않는다. 예수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성경 역사를 보아도 스데반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행7:51-60). 베드로가 3천명을 회개시킨 설교도 그들은 잃어버린바 된 사람들이고, 죄인이고, 회개하라고 외쳤다(행2:37-41).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그 사람이 먼저 잃어버린바 된 죄인임을 말하여야 한다(행8:32-37).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면 구원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기의 공로가 충분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다. 구원의 감격도, 구원의 감사도, 은혜의 삶도 살 수 없다. 죄에서 자유가 없다. 구원이 없다. 그래서 복음 증거자들은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행5:42; 20:20). 그리고 어두움은 이 메시지를 견디지 못한다. 복음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생명
을 주는 것이지만 항상 친절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고 또한 죄인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다(롬3:10-18).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말한다(롬1:18).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로 고칠 수 없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엡2:8-10). 인간의 최고의 행위도 배설물보다 못하다(빌3:8; 사64:6). 예수 그리스도 밖의 모든 노력도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다(요14:6). 따라서 죄에 대한 지적이 없는 복음, 공격적이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 증거의 결과는 항상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삶을 살던지 아니면 복음을 거부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그 거부는 복음 증거자와 믿는 사람들에게 핍박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상반된 결과를 얻는 것은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 증거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죄에 대한 지적,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때로는 공격적으로 들리는 이 부분을 말하지 않고도 복음의 좋은 것만 강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는 당신의 생활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부분적인 복음으로, 혹은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전락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렇다면 평화가 없기에 평화를 추구하고 관용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 세상에서 복음을 어떻게 증거 할 것인가? 우리가 복음의 독특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듣기 싫어하는 부분들은 다 잘라내고 부드러운 ‘how to improve’ 복음으로 전환해야 하는가?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역시 복음의 공격성을 결코 감추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증거하는 메시지는 듣기 싫어하는 내용이지만 사람들은 심령 깊은 곳에서 그것이 진리임을 알고 있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심비에 새겨진 진리이다. 살기 위하여서 꼭 들어야 할 말씀이고 들을 때에 성령님께서 마음을 여시니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임하게 된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할 때 공격적이거나, 무례하거나, 모욕적이거나, 불쾌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접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공격성과 무례함 때문에 복음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태도, 죄인을 정죄하는 태도, 나는 당신보다 낫다는 태도는 복음 증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원화 세상에서의 복음 증거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야 한다. 우리의 태도는 주님의 사랑이 넘쳐나야 한다. 예수님처럼 온유와 겸손의 성품이어야 한다. 가식이 아닌 진정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그래, 복음증거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만이 하신다. 기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연다. 그리고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입을 열면 나머지 일은 성령님이 하신다.
갈수록 복음 증거하기가 어려워진다. 마지막 시대의 영혼구원의 사명을 받은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믿고 확신해야 한다. 또한 믿지 않는 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나의 죄를 자복하고 주님 앞에 나의 모습을 살피는 영적인 겸손이 필요하다. 성령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눈에는 거칠어 보이는 그 복음으로, 십자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대를 살리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다. 다원화 된 세상이 거부하는 복음의 공격성은 성령님의 일하심만으로 그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