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혜천 목사
북한이 다시 한반도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았다. 연평도의 평화가 깨진 것이다. 10년전 연평해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대대적인 포격을 해왔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강도 높은 군사적인 도발이다. 북한이 남한의 영토에 포격을 가하고 심지어는 민가와 민간인들까지 무차별 포격을 한 것은 비인도적인 만행이다.
여기에 다양한 추측들이 나온다. 이번에 북한의 포격은 과거와 다른 군사적 행동유형을 드러낸 것은 북쪽내부의 다급한 사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김연수 국방대교수는 “북한이 한반도위기지수를 끌어올리는 도발패턴을 보인 것은 후계체제 안착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탓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르는 3대 세습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발생하는 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잘 쓰는 고강도의 대내외적인 충격요법을 일 것이라는 말이다. 북한이 연평도의 평화를 깸으로 후계체제를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군사적인 도발을 일으킴을 통해서 한국과 미국의 태도변화를 유도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세계적인 뜨거운 감자는 북한의 핵 계발이다. 2005년 뉴욕타임tm는 북한에 고품질 우라늄 총매장량은 전세계 총매장량의 5배가 되는 2천6백만톤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지난 21일 해커소장은 북한영변 핵과학연구센터에 방문해서 북한의 경수로와 우라늄 농축시설을 둘러보았다. 북한은 1천개가 넘는 원심분리기를 보여주면서 보유수가 2천개가 넘는다고 전했다. 해커박사의 분석에 의하면 북한은 농축우라늄으로 매년 핵무기 2개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우라늄 핵무기는 플루토늄과 달리 거대한 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공위성으로 잡히지 않게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에 큰 위협과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 사태를 소강상태에 있는 6자회담과 세계적인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리수라 보기도 한다. 북한이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을 선언한지 잇달아 대화공세를 펼쳤음에도 한국의 대규모 지원 및 금강산관광 재개 불가의 입장을 변하지 않으니까 천안함 사건에 이은 또 다른 충격요법으로 남쪽에 위기사항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제적으로는 초강도의 긴장을 불러일으킴으로 여론을 악화시키게 되면 위험한 정세를 진화하려는 한국과 미국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초강수라는 평가이다. 물론 남쪽과 미국의 대응 방향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노림수와는 달리 한국과 미국의 대북 협상파의 입지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다. 초강경 공격에 대한 반응은 평화론 보다는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고 강경론이 우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천안함 사건을 통해서 강경태도를 고수하다가 최근에는 대화제의로 바꾸었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으니 이번 포격으로 극약처방을 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산적한 북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다. 더 이상의 북한의 도발이 있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전쟁이나 무력도발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서 가장 길고도 아픈 역사가 전쟁의 역사이다. 전쟁사를 연구한 한 학자는 인류의 역사이후 4천년 동안에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불과 300여년에 불과하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었고 전쟁은 전세적으로 지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우리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다. 반만년의 역사 가운데서 수많은 전쟁을 치룬 우리에게 금년초의 천안함 사건에 이어 다시 한번 더 연평도의 평화가 깨지게 된 것이다.
성경도 전쟁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가인은 살인을 한다. 가정의 전쟁으로 시작해서 가인의 후예들은 죄의식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다. 라멕은 자기의 창상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자랑한다. 살인자 가인의 죽인자의 벌이 7배이라면 살인자 라멕을 위해서는 77배라고 간악함을 선포한다 (창4:24). 이것이 라멕의 논리이고 죄인의 논리이다. 더구나 전쟁은 말세의 징조중에 하나이다. 성경은 전쟁이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만 해도 3개의 전쟁이 나온다. 인류의 역사는 유브라데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천년왕국 후의 마곡의 전쟁으로 끝난다. 우리는 마지막 종말 예언의 성취를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의 논리는 평화를 위해서 무력을 기른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 평화를 유지하고자 함이요, 또 평화를 위해서 힘을 길러서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강력한 무기가 평화를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보복과 힘의 평화를 주장한다. 힘의 균형이 깨질 때 평화가 깨진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정치의 논리이다. 레이건이 구축한 미국의 MX미사일의 이름이 preacemaker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지만 성경의 평화는 샬롬(shalom)이다. 부분적인 평화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번영과 평화이다. 성경의 평화는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에덴이 평화의 동산이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평화가 온다. 주님이 평강의 왕이시고, 첫번 성탄절에 천사들의 선포는 ‘이 땅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이었다. 완전한 평화는 주님의 재림으로 이뤄진다. 새하늘과 새땅은, 천국은 평화의 나라이다.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에 누리게 된다.
평화는 예수님을 모실 때에 온다. 사람이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6자회담을 하고 수많은 평화조약을 만들지만 사람들은 평화가 영구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얼마 있지 않으면 깨질 것을 알면서도 잠시의 평화를 위해서 평화조약을 맺는다. 한 역사가에 의하면 지난 3100년 동안 8천여 개의 평화조약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 대부분이 다 깨지고 유지된 것은 8%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월남전도 그랬다. 미국은 총성이 그치면 평화라고 빠져 나갈 구실을 찾았고, 월맹의 호지명의 평화는 월맹으로 인한 적화통일이었다. 그 조약으로 키신저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호지명은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억지 평화논리의 부당성을 알았나 보다. 지금의 이라크전쟁이나, 아프간전쟁도 그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평화를 돈주고 사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처럼 돈을 갖다줘 유지한 평화는 평화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는다.
평화는 전쟁의 부재나 다툼의 부재가 아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문제를 해결할 때 주신다. 평화가 깨진 것은 죄 때문에 왔다. 죄 때문에 살인이 났고 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평화는 의로움과 관계된다. 죄를 용서함 받고 의롭다하심을 받을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하고 누리게 된다. 그래서 초림하신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 부활하셨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린다(요14:27). 시대와 공간과 환경을 초월한 평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