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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눈으로 본 세상

행복 전도사의 불행한 죽음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혜천 목사

한국이 또 다시 자살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행복 디자이너, 행복 전도사’ 라고 불리던 최윤희씨의 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이다.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우울증과 고난을 이겨온 그녀가 말하는 거침이 없던 행복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인기를 누렸다.

행복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녀는 행복과 긍정에 대하여 설파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과거의 아픔과 실패를 극복하는 경험담으로 명사가 되었다. 그녀는 행복에 관한 글을 50여권이나 남겼다. 그녀는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삶의 행복을 강조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충동을 살자로 뒤엎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의 이야기를 루프스 병의 통증 때문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자살은 그녀가 설파한 행복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녀의 자살로 끌고 간 그녀의 행복하지 못한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또 한 번의 자살의 충격 속에 빠지게 되었다. 어떤 분은 한국을 자살 공화국이라고까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09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자살률이 10만명 당 31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불명예스럽게도 한국은 2003년의 헝가리와 일본을 제치고 자살대국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자살 사건만 해도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연예인들의 연속되는 자살, 전 대법원장, 교수, 경영인, 지자체장 등 열 손가락으로도 세기에 부족하다. 물론 사회의 리더들이 일부이기는 하지만 줄줄이 목숨을 끊는 것은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내가 고인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싸잡아서 비난하거나 매도할 생각은 없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700가지가 넘는 통증으로 힘들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살의 파괴성이 미치는 영향은 그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를 뒤흔드는 악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유명강사의 부부동반 자살은 어떤 이유로든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녀는 결국 행복을 버리고 불행을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그녀가 그동안 외쳐왔던 행복의 언어들은 설득력을 잃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무너졌다. 이 말은 프랑스어로 사회층 고위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귀족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부터 기업인, 연예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자살이라는 무책임한 선택을 통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절망하게 하고 아프게 했다.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적이 아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한국이 경제 대국이 되고 G20을 주최할 만큼 국제적인 위상이 올라갔는데 잘사는 나라, 명품의 나라, 하이테크, 유명인의 화려한 삶의 치장들도 텅 빈 인생의 마음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누구나 자살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다룰 권리는 없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내가 스스로 취한다는 것은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한국이 가진 자살공화국이라는 불명예 때문에 한국 사회를 절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살자가 늘어나는 이유로 빈부격차와 황금만능주의를 지적한다. 성공지상주의의 사회적인 정서가 가정을 붕괴시켰으며, 도덕을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으로 노인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는 소리도 있다. 특별히 통증으로 고통 하는 암 말기 환자 등 통증관리에 대한 개선을 요청하기도 한다.

현대의 인기 있는 강의는 단연 행복론이다. 현대는 웰빙과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학교에서도 TV에서도 색깔이 다른 출처불명의 각양의 행복론이 설파된다. 대학에서도 행복학이 인기라고 한다. 왜 그럴까? 역설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하고 싶은 갈망 때문일 것이다. 마치 진정한 리더의 부재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리더십에 대한 강좌가 인기가 높은 것과 같은 현상일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언어의 유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행복했다던 그녀의 죽음은 행복이란 결국 인간의 노력이나 소망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준 셈이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행복한 삶이란 인생과 우주의 확실한 보장이 되시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목사로서 장례를 집례하고 참여할 때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체험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는다. 부활이요 생명 되시는 주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크신 사랑인지 감동을 받는다. 행복한 삶도 행복한 죽음도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을 감당하고 생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다.

불교를 포함한 세상의 종교나 철학 사조에서는 자살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가져왔다. 물론 성경에서도 자살하는 경우들이 나온다. 사울과 그의 시종(삼상 31:1-6), 이스라엘 왕 시므리(왕상 16:15-19), 압살롬의 지혜자 아히도벨(삼하 17:23), 가룟 유다(마 27:3-5, 행 1:18)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죄 속에서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죄이다. 생명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께서만이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시 36:9).

성도는 고난과 고통과 절망과 어두움 속에서 생명을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고난을 이긴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증인과 승리자들이 있다. 지금도 고통 중에서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며 생명을 주심을 찬양하는 승리자들이 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희망의 전도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닉 부이치치이다. 그는 얼굴과 맨 몸뚱아리뿐인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는 신체적 조건을 타고 났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향한 열정과 유머로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젊은이의 치열한 도전이 담겨 있다. 그의 자서전으로 전 세계 동시 출간된 닉 부이치치의 ‘허그’(원제: The life without limits)에서 자신이 체험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간증하며,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물론 사람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인생에 행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이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분홍빛 행복론이 아니다. 동전을 넣어서 자판기에서 뽑을 수 있는 인스턴트 행복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정한 행복이다. 그 행복은 하나님의 복이다.

주님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온다고 하신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고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시는 은총이라고 하신다. 성경은 8복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말씀하신다.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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