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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상을 이기는 힘

- 사명, 믿음, 신앙
전남수 목사

이 땅에서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세상의 지혜, 지식, 물질, 배경 등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있던지 없던지 오직 한 가지를 분명히 정리하고 가면 될 것이다.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믿음”이다. 감당할 일이 좋고 나쁘고, 감당할 조건이 되고 안 되고를 판단하지 않을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대상, 즉 맡겨주신 자에 대한 믿음만 변치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삶의 일들, 사회생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온전히 감당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바탕이 된 ‘신앙생활 믿음생활’에서 그 모든 기초를 시작해야 한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의 믿음 준비가 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준비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 최선의 준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이루는 과정의 섭리 안에서 그를 애굽에 오도록 하셨다. 그러나 요셉의 삶의 출발은 그에게 이해와 상식을 가지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형제가 자신을 죽이려 했고, 그 과정에서 노예로 팔렸다.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노예로서 애굽 이민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그의 작은 머리로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그저 주어진 일에 열심히 열심으로 마당을 쓸었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과정을 지났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마당 쓰는 종들과 집안의 모든 종들을 총괄하는 그들의 매니저가 되어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이해와 상식의 틀을 가지고서 처음부터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자 했다면 그는 아마 제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원수 적들도 아닌 자신의 형제들이 자신을 떼 지어 죽이려 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꿈을 주셨는데, 그 꿈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에게 닥친 이런 저런 문제들을 오늘날 생각해보면 그는 단 하루도 제 정신으로 살지 못할 트라우마를 가졌을 것이다. 무슨 일을 만나도, 항상 ‘상처, 과거의 그 인간을 안 만났더라면 그가 그런 말을 안했더라면... 등등’의 말로 자신의 연약한 신앙을 해석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아마 저들의 표상 같은 인물이었을 법 할 것이다. 상처투성이, 정신분열증, 혹은 현실 부적응의 온갖 이유들을 다 갖다 부칠만한 인생이 요셉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해석이 되지 않는 인생이다. 

 

이해와 상식, 믿음

 

게다가 모든 상처를 품고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고 보디발의 집에서 마음잡고 일하는데, 이제는 보스의 아내가 자신을 죄 가운데 유혹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어려운 상황조건 속에서도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앙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인가? 그럼에도 그가 가야될 다음 종착지로 예비된 곳은 다름 아닌 정치범 수용소 감옥이었던 것이다. 보통의 죄명을 따라가면 잡범들이나 가는 감옥에 갔을 터인데 그가 간 곳은 정치범들이 들어와 있던 그런 고급 수용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또다시 기가 막혔을 것이다. 

형제들에게 죽기 직전에 노예로 팔려와 그래도 살아보려 하지 않았던가? 죄의 유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승리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다시는 햇빛을 보기 어려운 정치범 수용소란 말인가? 전혀 이해와 상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설명되지 않을 그런 매 순간 순간마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반응했던 것을 본다. 이해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해석이 되지 못하면 해석을 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해석하면 원망과 불평밖에 나오지 않을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요셉은 이성을 사용해서 이해하려하거나 혹은 상식의 선에서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형제들과의 상봉에서 발견되는 그의 면모를 보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오직 한분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신뢰하고 붙드는 것 뿐 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삶을 해석하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내었던 것이다. 

 

섭리를 이루는 준비과정

 

믿음을 해칠만한 생각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며 취하는 자세가 그러하다. 그런 단순한 믿음의 신앙이 결국 요셉으로 하여금 어려운 현실의 문제 앞에서도 가장 올바른 처신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애굽의 총리로 잘 준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요셉의 애굽에서의 위치가 최종적으로 총리대신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준비 없이 저절로 되지는 않을 일이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오는 순간, ‘너 오늘부터 총리 해’라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십년 넘은 세월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특별히 억울한 감옥살이이지만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믿음을 지키는 가운데 참으로 온전하게 준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 지하 감옥에서 그는 고급 정치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아마도 그들로부터 애굽의 정치, 경제, 문화 등과 고급 애굽어까지 습득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마디로 총리가 될 학습준비를 거기서 했다고 볼 수 있다.

 

삶을 이기는 능력

 

요셉을 요셉되게 한 모든 일들의 중심에 그의 믿음이 존재한다. 그의 단순하고 간결한 믿음이 순간순간 그의 삶을 이성과 상식의 그늘아래에서 무너뜨리고자 하는 극한 위기들 속에서도 잘 버티고 견디게 해주었으며,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환경에 매이지 않고서 이를 멋지게 극복하고 삶의 튼실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과정들을 보노라면 믿음, 신앙의 준비가 모든 중심에 자리하는 것을 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믿음은 힘이다. 신앙은 삶을 이기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가는 그의 신앙이 삶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어떤 신앙이 그토록 능력이 되는가? 순수한 신앙이다. 단순한 신앙이다. 복잡하지 않는 것이다. 믿었으면 믿은 대로,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신앙은 기술로 하는 것도,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해와 상식도 아니다.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상식에 교회를 꿰맞추려하는 것을 본다. 잘못 가는 길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헌신하고 충성하며 사는 것이다.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을 이끌어가는 축복의 원리가 된다. 이러한 믿음의 원리에 선명하게 서 있는 사람은, 그에게 맡겨진 세상의 일들 앞에서도 넉넉하게 잘 준비되어 승리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눈치

 

고신대 총장이신 안민 장로님이라고 계신다. 이분은 평교수 시절에 자신이 주동하여 합창단을 만들고 찬양집회와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한다. 집회 중에 그는 대학의 현실을 소개하면서 학교에 음악실을 만들고 기타 여러 가지 학교를 위한 후원들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한 일들은 실제는 총장이 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평교수가 그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명했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학교를 위해 일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평교수가 총장의 일을 했더니, 하나님이 총장을 시켜주시더라’는 것이다. 결국 신학교와 교단을 모체로 하는 대학에서 목사 아닌 장로가 총장을 하는 그런 일이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코람데오의 신앙이 현실 속에서 삶의 열매로 그것을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뉴욕 맨하탄의 델리 가게에서 일하는 잘 아는 교회 집사님이 계셨다. 주인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담임목사님이 성도들을 그렇게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가게 출근하면 주인이 네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알고 최선을 다해 섬기고 봉사해라. 그것이 사명이다.’ 그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 말에 순종했던 성도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다. 어느 날 그 주인이 집사님을 부르더니, 열쇠를 맡기더라는 것이다. 본인은 한국에 갈 테니 가게를 잘 운영하면서 돈을 보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고백이다. ‘종이 주인처럼 일을 하니 주인의 것이 내 것이 되더라’는 것이다.

콜린 파월 합참의장은 흑인으로서 합참의장에 오른 사람이다. 그의 전기를 보면 그의 삶에 모멘텀이 있었던 것을 본다. 대학시절 그로서리 가게 일을 하였는데, 퇴근할 무렵에 창고에 콜라박스가 넘어져 주위가 어지럽혀 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의 상식은 그냥 나갈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우연히 주인이 보고서는 그 주인이 그의 학창시절을 지나는 동안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그의 전 인생을 좌우할 모멘텀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군가 보고 있다’라는 사상이다. 그는 아주 간결하게 말한다. “Someone is watching. Who is someone? Someone is God.” 그때부터 그는 ROTC 장교를 거쳐서 위관장교, 영관장교, 장성에 이르기까지 늘 항상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이 사상 가운데 최선의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인생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인생이 되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영광도 얻을 수 있었노라고 말한다. 

          

삶의 준비, 신앙준비

 

기독교의 신앙은 천국만 가면 그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이미 이 땅에서부터 천국순례의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이 길은 우리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와 동행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이다. 현실의 삶은 거친 광야와 다를 바가 없어서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해와 상식을 들이대고 설명과 해석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과부화(?)로 문제가 드러날 것이며 삶은 피폐하고 말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해와 상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야 한다. 조금 더 순수하게 조금 더 단순하게 반응하는 것이 지혜이다. 어려움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혹여 힘이 되지 못해 보일 지라도 그냥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시고 복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사는 것이 힘이 드는가? 기술과 재능으로 이기려하지 않기를 권한다.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분명히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이기고 경영할 능력과 힘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신앙이 세상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다. 

davidnjeon@yahoo.com

09.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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