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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그 이후, 위기와 회복

- 코로나의 영향과 경향(傾向). 정면돌파
전남수 목사

백신접종 그 이후

 

현재는 코로나백신의 보급으로, 마스크 착용 자체가 해제된 상황이다. 그러나 일년이 넘는 오랜 시간의 습관과 수십만 명이 죽게 된 상황에서 느끼는 여전한 두려움들은 쉽게 마스크를 벗지 못하게 한다. 물론 변종바이러스의 생성과 같은 어려움의 가능성과 예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상황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모든 것이 나아져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백신의 보급으로 인한 방역의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중에 백신보급 이후의 교회들의 상황들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지역과 교회 형편을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백신보급 이후에도 여전한 긴장감이 교회나 목사님들에게 남아있다는 사실과 예전보다 더 교회와 예배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으시다는 사실이었다.

백신접종 후 예전과 같은 숫자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들이 있었지만 백신접종 이후 나타나나는 현상들이 기대만큼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고민이 깊어지는 부분이다. 사람의 모이는 숫자의 많고 적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맡아 성도들을 목양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모습들이 교회의 위기로도 비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의 핵심은 간결했다. 

백신이 보급되기 전에는 교회 성도들의 모이지 않음을 단순히 예방차원의 것으로 이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백신이 보급되고 2차접종이 완료되었음에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회복의 상황들이 기대만큼 되어지지 못함에 내심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자신의 목회 열매의 허전함으로 보는 것과 같고, 더불어 코로나로 잘(?) 훈련되어진 인터넷 문명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은 염려 때문이다.  

 

코로나 환경, 익숙함과 잠식

 

먼저, 어떤 영적인 영향들이 코로나의 발병으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와 성도들 혹은 세상을 흔들어 왔는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코로나로 인한 환경의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표현하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뉴노멀(New-Normal), 언택트(Un-tact), 비대면 공동체 등의 용어이다. 이와 같은 단어가 생길만한 상황의 변화들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식당은 테이크아웃을 기본 필수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편리한 지 많은 식당들이 아직도 인사이드를 오픈하지 않는다. 학교도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전혀 학교를 갈 필요가 없어지는 온라인 대세의 시대를 열었다. 온라인 강좌가 그렇게 유용한 지는 예전에 미처 몰랐을 것이다. 더 이상 어딘가를 가지 않고도 계속해서 방콕, 집콕하며 의식주가 해결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여기에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빅 데이터이다. 빅 데이터란 존재가 내 생각과 기호를 읽고 보고 있다는 생각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이제는 서점도 갈 필요가 없다. 책을 사지 않고 가정에서 그냥 아이패드를 들고 e-book을 읽거나 대신 읽어주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는 방안에서 태어나 지내다가 방안에서 죽게 되는, 그런 세상을 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항상 다가올 미래 시대의 이야기 소재였었다. 그런데 금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변화의 가속도가 붙은 나머지 이제는 이미 다가온 미래가 되어버렸다. 이런 때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어떻게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 속에 제대로 반응할 것인가?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세상과 다른 우리만의 질문들을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것이다. 이제 백신의 보급으로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오랜 기간 질병과의 투쟁가운데 여러모로 익숙해져 버린, 탈 교회 탈 신앙화의 많은 독소들을 어떻게 정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해야 된다.  

 

편리주의, 세속화 

 

혹자는 코로나시대를 지나면서 익숙한 인터넷 환경에서 더 나아가 인터넷 교회, 가상현실속의 예배, 인터넷 성찬과 세례의 가능성을 논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교회가 성경을 기준하여 세상을 판단함이 아니라 급히 서둘러 세상에 맞추어 세상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주신 인터넷으로 코로나시대를 극복할 수 있었노라고, ‘인터넷영상예배’에 대해 감동과 지지를 보낸다. 이것을 선교적 대안이라고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 서울과 분당의 어느 목사는 건물이 교회가 아니므로 꼭 교회로 모이지 않아도 우리가 있는 그곳이 교회라고 말한다. 더불어 교회를 신앙생활의 기준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정말 이러다 보면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예배하는 처소도 필요 없다는 예배당 무용론에 도달할지 모를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존경받는 은퇴목사가 멋진 영상의 배경과 음악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 언설들을 나열하는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라는 대포로 교회를 박살내었다는 정신없는 이야기를 방송국프로그램을 통해 뱉어낸 것이다. ‘성과 같은 교회에 하나님께서 코로나 대포를 쏘아줌으로 성도들을 흩어버리고 영상예배와 같은 특별한 은혜의 도구를 허락하셔서 오히려 회복을 맛본다’는 엉터리이야기였다. 말에 재능 있는 이분에게 동조하는 많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SNS를 통해 급속히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교회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들이 많이 등장하는 때에 이런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이제는 더 이상 구별됨의 장소로서의 교회는 무너진 것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염려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편리주의, 소비자중심

왜 이렇게 쉽게 세상의 흐름가운데 동화되어가는 것일까? 익숙함과 편리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편리함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운 생각도 가져야 한다. 특히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사회가 확장되면서, 다양한 앱의 첨단기능으로 무장한 채 생활현장 곳곳에서 점점 더 공격적으로 교회와 예배를 훼방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그 기능들 자체에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러면서 또 질문해본다. 과연 편리해지는 것만이 진보와 발전인가? 인간으로서 삶의 편리함을 거부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것이 영적인 부분까지 침투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악성 편리주의라면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삶의 지나친 편리주의는 반드시 죄로 가득한 세속화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전은 마치 바벨탑을 쌓는 기술처럼 인간 스스로를 굉장한 존재로 인식하며 예배와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소비자 중심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다. 마치 물건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듯이, 자기만족과 기쁨과 편안함이 목적인 소비자 중심주의적인 태도가 교회에서도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배의 장소뿐 아니라, 시간도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소비자로서의 성도를 중심으로 편리하게 모든 것이 재편하게 될 것 같다. 아마도 세상도 이에 발맞추어 모든 상황을 주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교묘하게 변경시켜갈 것이다. 

 

상대적 진리와 다원주의

 

하나님 정하신 불변의 진리에 대해서도 야금야금 환경을 핑계로 점차 상대화시켜가는 것을 본다. 이해되고 설득되어야 통하는 것이고, 설교도 내 귀에 들려져야 좋은 설교가 아닌가? 라고 쉽게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경향은 2가지 방향으로 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매우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가지는 진리에 대해 자신이 받는 인정만큼 자신들도 쉽게 자기 진용을 파괴하는 관용도 하겠다는 것이다. 아주 복잡 다변한 세상이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진리의 상대화가 강해지면 필히 다양성에 기반한 다원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번 섞어보자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므로, 더 우월한 진리를 찾아서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복리를 누려보자는 것이지만 사실은 진리를 거스르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구별된 거룩성을 위배하면서까지 이룰 모두의 만족과 화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다원주의를 급격히 수용하는 시대를 더 격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일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기점으로 엄청난 변화와 진리의 변질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뉴노멀, 언택트, 비대면 사회의 연습은 장차 더 빠른 속도로 다원주의 사회를 경험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면 돌파

 

이럴 때, 과연 교회와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코로나시기를 지나면서 많은 기독교신문들이 미래교회를 예측하였다. 백신이 보급되고 코로나가 잠잠해져도, 결국은 기존 교인의 30%만 돌아올지 모른다는 척박한 예단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예배의 활성화로 인한 주일성수개념의 파괴와 여러 가지 방종의 현상들을 보노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불안함 마음을 가지게 된다. 코로나를 핑계로 인해 모이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행태들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신(新)사사시대의 등장을 앞당긴 많은 징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되어진 여러 정황들을 볼 때 30%의 범위는 넘어서는 것 같지만 여러 면에서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감지된다. 

이 모든 상황들 앞에서 성경이 말하는 단순한 원리를 생각하며 ‘정면 돌파’할 것을 제안한다. 성경에 염병의 문제가 터지면 어떻게 하라고 하였는가? 주의 성전에서 회개하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다. 염병의 문제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럴 때 땅을 고쳐주시며 회복시켜 주시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코로나는 아주 지독한 괴질이다. 염병 그 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이를 치유할 기도와 예배의 자리까지 폐쇄하는 그런 상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와 교회생활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 괴질의 문제 앞에서 그 방향을 정면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조금씩 교회의 문이 열려지면서 그동안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모이지 않도록 진행되었던 여러 방향의 일들을 거꾸로 거스르며 더욱 모이도록 하는 일에 최선의 경주를 해야 한다. 한번이라도 더 교회에 발걸음 할 수 있도록, 한번이라도 더 주의 성전을 향해 몸을 움직일 길을 찾아야 한다. 혼돈된 사사시대를 지나며 사무엘 선지자가 미스바 성회를 개최한 것처럼 부흥성회를 열고 특별기도회로 모이고 성도들에게 기본적인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성경학교를 오픈하고 인원에 여유가 생기는 새벽기도회를 강조하면서 다시 모든 것을 교회로 모이는 방향으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 

온라인 교회, 인터넷이라는 선물, 영상예배 등의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는 교회와 몸을 움직여 주님 앞에 나아와 드리는 예배의 회복’을 가로막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를 편하게 해주고 그렇게 함으로 그 마음을 잠시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 안되면 될 때까지. 그렇게 예배하며 교회를 사랑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와 예배를 사랑하시는 자를 반드시 귀히 여기고 사랑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davidnjeon@yahoo.com

05.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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