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성숙해졌다는 말에 가장 근접한 표현은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성숙과 변화는 신앙용어로서 일맥상통하게 사용될 수 있다. 변화는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관찰된다. 봄날에 씨가 뿌려져 뜨거운 여름을 지나 탐스러운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이 변화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도 생물과 같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아 새 생명의 감격가운데 중생하여 다시 태어난 삶,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삶에도 변화로서의 성숙이 요구된다. 그렇게 거듭난 새 생명은 반드시 성숙과 변화의 열매를 드러내야 한다. 그러한 성숙과 변화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가? 보는 눈, 관점이 바뀌고 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이 바뀐다는 것은 삶을 대하는 해석과 분별력이 새로워진 것을 의미한다.
참된 변화-관점의 변화
참된 변화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 그 열매를 다르게 맺는다. 관점의 변화는 눈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참된 관점의 변화는 반드시 사람 자체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동일한 문제를 만나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는 것을 본다.
익히 잘 아는 예를 들어보면, 같은 물을 마셔도 젖소라는 존재는 우유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유익함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독사라는 뱀의 존재는 같은 물을 마셔도 악한 독을 생산하여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같은 고난의 문제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은 그 문제로 인해 점점 독해지고 악해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런 고난을 통해 점점 더 변화되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훗날 그 고난을 오히려 축복과 간증의 제목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의 차이,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삶의 성숙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곳 지역을 배경으로 ‘미나리’라는 영화가 큰 유행이 되고 있다. 강과 숲과 호수와 자연이 아름다워 닉 네임이 Natural State인 알칸사를 더 잘 소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아마도 당시의 삶에 지치고 힘든 이민자의 눈에는 그런 경치조차 잘 들어오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더불어 영화를 보면서, 부모세대를 칭하는 이민 1세대의 어려움을 다시금 느끼며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소설 같은 이민 1세대
이곳에서 실제 미나리의 주인공 같은 분을 만나게 된다. 대한민국의 땅을 조금 더 넓히는 꿈을 가지고, 한국의 사업체를 정리하고 알칸사의 700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구해서 목장을 이룰 꿈을 가지고 40년 전 이곳으로 오신 분이 계신다. 그러나 결국은 한인도 없는 외진 곳에서 농장을 일구다가 동업자였던 미국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모두 잃어버렸다. 당장에 먹고 살 것이 궁핍해진 그분은, 거라지 세일을 찾아다니면서 쓸만한 전자제품 중고를 싸게 사서 이를 고친 후에 다시 플리마켓 같은 곳에 내다팔면서 자녀들을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아마 죽을 만큼 힘드셨다고 하니, 고생은 차치하고서라도 믿었던 사람에게 속은 그 마음의 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당시 두 분을 온전히 일으켜 세워준 것은, 대개 이민 1세대가 그렇듯이 착하고 공부 잘하는 두 자녀였다고 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고생하는 부모의 수고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은 아들 며느리 사위 모두 의사인 여유로운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또 어느 여성분은 이민 와서 하루에 세 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낮에는 봉제공장, 퇴근하면 떡을 주문받아 팔고, 떡 주문과 상관없는 날에도 쉬는 것이 아니라 밤늦게 빌딩청소를 다녔다고 한다. 그런 부모들의 억척스런 고생 속에 자란 자녀들이 일찍 성숙해지는 것을 본다. 부모의 그 마음을 헤아린 자녀가 명문대를 나와서 미국의 중심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좋은 미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종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어달리다보니 자녀들의 교육에 잠시 소홀한 틈을 타서, 나이가 많도록 부모의 속을 태우는 그런 경우들도 많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앙의 내용을 생략한 채, 미나리 영화와 관련하여 이민자들의 생활면만 찾아보면 이민자들의 고생담 그 자체는 모두가 소설책 한두 권은 너끈히 쓸 수 있는 분량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사랑, 감사, 은혜의 변화
어떤 기회에 고생했던 이민자들, 그들 자녀들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관된 스토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참 순수하고 순진함이 저들 가운데 있음을 보면서, 저들 2세들의 마음속에 따로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예전 1세들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부모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 감동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쉽지 않는 한국말로 부모님의 고생을 이야기할 때, 저들 모두 한결 같이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것이다.
더불어, 그런 고생하는 부모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은혜가 자신의 삶의 관점을 새롭게 하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왔다는 고백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중심해서 판단하던 그런 못된(?) 삶이, 어느 순간 동일한 일을 두고서도 부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며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하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세들 중에, 어린 시절 집에 중요한 편지가 오면 늘 자기에게 당연하듯이(?) 부탁하는 엄마 아빠를 보며 ‘왜 이렇게 엄마 아빠는 영어를 못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때로는 창피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 모임을 하면, 영어를 한마디도 자신 있게 못하는 엄마 아빠를 보면 피하고 싶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 아빠가 겪는 그 눈물과 고통스런 삶의 현장을 우연히 지나치듯 보게 되었는데, 그 고통이 자신에게 전달되면서 동일한 일인데도 전혀 다르게 판단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날도 아버지는 영문편지를 하나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체면이 있으셨는지 나름 몇 자를 띄엄띄엄 읽은 흔적을 드러내시면서 읽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늘 귀찮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날만큼은 전혀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하지’ 하는 마음이 들었든 게 아니라, 이렇게 영어를 못하면서도 이 거친 이민의 땅 미국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문을 열고 닫으며, 온갖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렇게 삶을 이겨내신 그 부모님이 너무 위대하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다음부터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날 그때부터 부모님의 편지 읽어주는 일 정도가 아니라, 공부나 생활의 일들을 돕는 것 등등 모든 것에 있어서 남다른 변화가 찾아오더라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부모님이 퇴근하시기도 전에 먼저 밥과 청소를 하고, 동생을 돌보고 그렇게 생활이 저절로 변화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부도 자발적인 의지가 작용해서인지, 모든 것에 발전과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관점의 변화로 인해 성숙의 열매를 맺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대부분의 철들고 성숙한 2세 자녀들의 삶의 변화와 내용이 이에 대동소이한 것을 듣고 보게 된다.
현재의 축복, 신앙의 유산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일상의 이민생활 가운데 드러나는 변화와 성숙, 그로 인한 열매가 귀하기는 하지만 실제는 부분적인 축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입신양명, 자수성가 외에 다른 열매를 생각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성공도 성숙도 구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영혼의 변화를 통한 온전한 삶의 성숙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많은 성공과 꿈의 실현이라는 축복도 그저 제한된 축복에 머물 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혈혈단신 가나안으로 이민 온 이민 1세대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집에서 길리운 사적 군사들의 숫자만 해도 수백명이 될 정도였으니, 그 가산의 규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굉장한 거부였다. 그 많은 재산이 다 어디로 갔을까? 대부분 이삭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 26장을 보면, 하늘 문이 닫히고 흉년이 찾아오니, 이삭은 보따리를 싸들고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땅에 머물도록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따라 이삭은 별로 재미없는 그 땅을, 오직 말씀 한 마디에 떠나지 아니하였고 쉽게 말하면 버티고 견뎠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삭을 크게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순종과 야곱의 기도라고 정의할 수 있는, 흔히 아이야(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룬 것이다.
부모의 은혜, 자녀의 평생
그렇게 이삭이 순종할 수 있는 기원이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재산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 먹고 살기위해 엉덩이를 들썩일 수밖에 없는 이삭을 보노라면, 이미 물려받은 재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이 명확하다. 그런 이삭이 어떻게 다시금 번성한 가문, 형통한 가문을 이룰 수 있었을까? 창세기 22장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산이 그의 눈을 바꿔 놓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친히 번제물 교보재가 되어,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온 몸으로 보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아까울 것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분임을, 그런 아버지 아브라함을 여호와 이레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런 신앙의 유산과 기억들이,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이삭이어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랄 땅으로 옮기고 애굽으로 다시 내려가고자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 말씀 앞에 멈추어 서게 한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남들보다 100배로 결실하는 복과 창성함을 덧입고, 핍박하던 왕들조차도 그의 축복을 인정하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온 이민 1세대이다.
그가 2세대인 이삭에게 남긴 재산, 그것은 하늘 문이 한 번 닫히면 다 날아가 버릴 휴지조각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삭에게 남겨준, 어떤 경우에도 말씀 앞에 순종하는 그 신앙의 유산은, 그의 삶의 관점을 바꾸었고, 변화와 성숙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는 중심에 자신과 자손들을 세우는 특별한 은혜를 덧입게 한 것이다.
알칸사를 배경으로 한 미나리 영화의 감동이 고생의 시간들을 지낸 한인들에게 위로와 감격으로 젖어든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다시 한번 더, 우리의 관점을 바꾸고 자녀들의 삶을 축복할 만한 원리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결코 재물의 번성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손주 손녀에게까지도 빌딩과 땅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삶의 관점을 바꿀만한 신앙의 유산, 말씀의 흔적, 기도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 있어야 나머지도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3.0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