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칸사의 새로운 법
금번 새롭게 제정된 알칸사의 주 법은 ‘정부는 모든 것이 닫히지 않는 한 교회도 닫을 수 없다’는 규정을 명시했다. 이 법은 교회폐쇄에 대한 주지사의 권한을 제한하고 예배당에 대한 종교적 자유 보호를 확대하는 법안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법안 HB 1211는 정부가 교회의 문을 닫도록 강요하는 세계적인 코로나 유행병 가운데 주 하원과 상원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주지사인 Asa Hutchinson은 이 법안이 서명 없이 법적효력을 얻도록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법은 비상사태의 상황 속에서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Hutchinson 주지사는 “종교조직에 요구사항을 적용하는 것이 강력한 정부 이익을 증진하는 데 필수적임을 입증하지 않는 한, 종교 조직에 상당한 부담을 부과하는 건강 안전 또는 점유 요건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법은 주민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법제화시킨 것에 의미가 있다.
역지사지보다 귀한 것
지극히 당연한 문제, 상식과 기준에 비추어보면 어려울 것이 없는 문제임에도 의외의 해석과 결론이 난무하는 것을 본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복음, 교회, 성경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동일한 크리스천이라 하여도,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답을 드러내는 것을 본다. ‘역지사지’라 하여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해하고자 함에도 이해가 상당히 어려운 신학자, 교수, 평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목회자들의 행태를 보고서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개혁주의 사상을 표명하는 신학자가 중세시대의 교회로부터의 신앙의 자유와 오늘날 코로나 환경 속에서 교회를 출입할 수 없는 환경을 연결해서 교회라는 건물에 성도들의 신앙이 갇히지 말도록 권고하는 책을 내었다. 앞으로 많은 가나안 성도들이 열광하며, 자신들의 교회밖 신앙생활의 근거로 삼을 것 같다. 책을 팔기위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언설들이다.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해 밤낮으로 땀 흘리는 목회자의 고통은 뒷전인 채 책상머리에 앉아 영혼을 복되게 하지 못할 일만 궁구한다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가 배운 지식은 그저 주님 앞에 받을 책망의 조건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는 은퇴목사가 멋진 영상의 배경과 음악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을 언설들을 나열하는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라는 대포로 교회를 박살내었다는 정신없는 이야기를 방송국 프로그램을 통해 뱉어낸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의 아들이 가요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여러 면에서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는 사람이 되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좋아요’를 꾹꾹 누르는 그의 다른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성경자체에 대한 통시적 해석이 아닌, 지엽적 세계관의 사상적인 접근으로 독자들을 감동(?)케 하는 것을 보았다. 교회를 파괴하는 내용이다. 어떤 교회는 장로가 되려면 1억, 권사가 되려면 5천만원을 내어야 하고, 돈을 내는 방법으로 은행안내까지 첨부했다는 예전부터 교회를 핍박하고자 등장시키는 대표적인 예를 끄집어내어 강론을 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를 신랄하게 박살내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호응을 하며 ‘좋아요’를 엄청 누르는 것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도 알 것인데, 설교의 흥분된 마음에 잠시 실수하는 것이었을까? 만일에 평생을 설교자로 살다가 그렇게 실수한 것이라면, 차라리 은퇴 후에 겸손히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그동안 누려온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면 알 것을 그렇게 떠들어야 했을까? 그의 멘탈이 의심스럽다. 임직식 헌금과 관련해, 과연 그렇게 상식 없는 요구서를 보내고 받고 하는 교회가 과연 대한민국에 몇 교회가 될 것인가? 왜 자신을 제외한 교회들을 그렇게 몽땅 도매금으로 제단을 하고 마는가? 자신의 언행이 일반 교회에 대해 믿음의 심지를 굳게 하지 못하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의로운 듯 들려지는 그의 거친 언어의 제초제가 어린 영혼의 싹을 궤사시켜버리는 느낌이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를 폄훼하기까지 하는 그의 설교내용을 들으면서, 가나안 성도들이 계속 생산되는 이 위급한 코로나시기에 차라리 조용히 침묵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유익함이 되는 것임을 깨닫기를, 제발 그 깨달음이 너무 늦어지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방향과 속도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속도를 내는 것은 죽음이요, 방황을 의미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까지도 해치고 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모든 것에 엄청 속도감이 붙은 것을 본다. 빌 게이츠의 말이다. '과거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었던 시대였으나 지금은 속도 빠른 것이 속도 느린 것을 잡아먹는 시대가 되었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정부분 동의가 되지만 속도만 빠른 것이어서는, 잘 잡아먹기만 해서는, 결코 좋은 결론과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요 사업가라 하여도 성경을 따라올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성경의 지혜는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러하다.
인터넷 시대, 유튜브 시대가 등장함으로 사람들은 생각하는 과정을 점점 잊어간다. 생각할 필요가 없이, 눈에 보이는 감각으로 오성의 인식에 의한 관념(觀念)을 만들 필요도 없이, 표피적 감각에 의해 판단하는 경향이 커졌다. 쉽게 쉽게 결정해 버린다. 속도에 희열을 느끼고 속도에 잠식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그 자체가 아주 불필요한 노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해악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통로가 점차 막혀져 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설교와 찬양의 영상들도 호기심을 이끌 수 있는 비주얼에 대한 내용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관심을 끄는 문구, 비주얼 영상을 위한 배경과 보이스, 최근 등장한 자막의 글씨의 효과적인 이용 등을 통해서 곰곰이 듣고 곱씹어서 영혼이 잘 소화할 기회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식량이 필요 없는 아주 간편한 알약의 등장을 연습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여도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바르고 참된 방향과 목표를 말씀하고 있다. 속도에 제압되지 말도록 권고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이 직접 깃발을 높이 드신 것이다. 다른 데 가지마라, 딴 생각하지 마라, 내가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다른 것에서 길을 찾고 진리를 찾지 마라.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것이 유익하고 눈에 좋아보이고 편리해보여도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그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와 예배를 회복하지 못하면 그 인생의 결국은 방황뿐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급하게 빨리 변할수록 더욱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오직 참 진리 되신 그리스도안에서만 인생은 긴 방황을 끝낼 수 있고, 진리가운데 생명의 거듭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교회를 가지 않아도 되고, 누구든지 다 예배를 인도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에 대한 깃발을 들고 흔든다면 얼마나 엉터리가 되고 말 것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우리가 뒤집을 수 없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과 생명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불편해 보인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땀을 흘려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아래 있을 때 가장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법과 기준이 없는 사람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깨닫게 된다. 이 법이 없으면 우리가 지옥으로 가는 기준도 천국으로 가는 기준도 없게 된다. 그러나 그 법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법 없이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범 크리스천 사회에 너무 많다. 자신이 원하는 생각들을 성경에 복종시키지 않고, 자기 나름의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책망 받을 불순종의 행위이다. 불순종이란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자기 생각을 우선하는 일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이다.
법과 기준이 없는 사람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해주신 길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 하나님 밖에 없다. 왜 그런가? 그분은 변하지 않고,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변한다. 남편도 변하고, 아내도 변한다. 아무리 잘 관리하고 좋은 것을 먹어도 몸도 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다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 외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 소멸되고 변한다. 믿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의 물질계는 다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주님, 말씀 밖에는 없다. 말씀은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개념으로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신뢰를 해보려고 하는 말일 뿐이지, 진정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 생각의 기준을 주님의 생각의 기준으로 옮겨야 한다. 나의 기준이 없어지고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의 기준을 지금도 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결국은 자기 생각 때문에 인생은 스스로 망해간다.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마음대로 바꾸려하는 시대이다. 남자와 여자, 교회와 예배, 세상과 세속 등의 많은 혼란함을 본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이다.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은 목회자, 목회자를 교육하는 신학자, 교수, 저명하다는 목사 등등 구별이 없다. 점차 당연히 나아야함에도 나음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자기 깃발, 자기 나팔을 불며 사람들에게 손짓하며 유혹한다. 간절하게 기도드린다. 모든 것이 빨라진 초스피드 시대에,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여도, 오직 주님의 깃발만 바라보며 주님의 나팔소리만 듣고 가게 하옵소서!
davidnjeon@yahoo.com
02.2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