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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고 사역하는 교회

-상실과 회복, 삶의 승리
전남수 목사

발병 숫자에서 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환자가 발생한 곳에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님과 통화할 기회가 있었다. 엄청난 어려움 속에 사투를 벌일 듯 하여 위로 겸 연락을 드렸는데, 의외로 안정이 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직 대기 중인데 안정이라니? 그분의 말의 의미는 ‘환자의 숫자가 많아도, 비록 전쟁통 같은 두려움이 있어도 조심스런 방역 속에 일상의 삶들이 움직여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연세 드신 분들이나 병이 있으신 분들에게 찾아오는 치명적인 상황만 피할 수 있다면 별 어려움 없이 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상실, 교회의 무기력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는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을 드렸다. 목사님의 조금 실망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회의 안정은 세상의 안정에 비해 속도감이 확실히 떨어진다는 말씀이었다. 세상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교회는 그동안 짧지 않은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에 모이지를 못하니,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재정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역의 동력, 영적인 힘들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실제 이것은 예견된 일이다. 마치 갑자기 사역지를 잃고 무임목사로 시간을 지나는 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의 무기력함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코로나로 사역이 멈추어졌을 때, 그동안 교회사역으로 소홀했던 집안일을 도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전의 힘든 사역으로 인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던 뒷마당 텃밭을 만드는 것이나, 운동 겸 집을 수리하는 사진들을 주고받으며, 더 좋은 핸드 드릴 등의 손 기계류는 어떻게 구입하는가에 대한 정보의 교환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제한적일 때 가능한 것이지, 목회자가 교회사역을 제쳐두고 계속해서 할 일은 아니기에, 어느 순간 세상은 적응되어 가는데 교회사역들은 그 역동성이 현저히 떨어짐을 보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무기력함에 빠져들었음을 본다.    

이민교회 뿐 아니라 한국의 소식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한국은 큰 팬데믹의 광풍은 지나가고 구체적인 숫자를 관리하는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관리가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예배자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고, 예배를 쪼개고 나누어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역조치들을 취하였음에도, 도무지 잘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필요한 일들은 해나가는 것을 보면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조금 규모가 있는 교회들에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났음을 본다. 오랜 시간 현장예배 없이 온라인으로 드려진 예배가 예배의 또 다른 정형으로 굳혀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많다는 것이다.  

 

담대한 외침, 위기중 위기

 

이제는 담대하게 교회로 오라고 외쳐야 한다. 코로나 백신 개발의 소식이 요원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최고의 방역, 최선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도록 강권할 때가 되었다. 연로하신 분들과 약하신 분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만 이제는 교회오라고 외쳐야 한다, 그러면 듣는 자가 있지 않겠는가? 어린 자녀로 인해 두렵고 힘이 들면 주일에 차를 가지고 파킹장에 와서 안전한 공간에서 주의 성전을 바라보면서라도 실시간 영상예배를 교회에서 드리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 삶의 필요에 대해서는 모든 것에 주저함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는 이렇게 선별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위기가 많다. 그러나 위기중의 최고의 위기는 예배드리지 못하는 위기이다.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이다. 교회의 예배가 안정이 되어있지 못하면, 세상의 평안과 안정도 잠시 지나가는 제한적인 일에 불과하다. 광야 같은 인생의 승리도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승리함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배의 위기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삶의 근본을 흔들어버릴 것이다. 구약의 왕들의 역사와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칭하여 한마디로 정리하면 ‘예배의 상실’로 인한 영적감각의 실종,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다시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돌아오면 산다는 것이다. 예배하면 산다는 것이다. 성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예배자의 삶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평소 예배를 강조한 교회에서는 평화로울 때에 전쟁을 연습하라는 말씀처럼 이 어려움에도 선전을 하고 있음을 본다. 정말 코로나 방역의 문제이면 차를 가지고 주차장(Drive-in Worship)에 와서라도 주의 전을 바라보며 예배하지 않겠는가? 그 예배자의 영혼을 살아계신 하나님이 돌아보시고 축복하여주실 것이다. 우리의 중심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와 건강의 조건들로 인해 성전까지 들어오지 못하여도 그 마음중심을 돌아봐주실 것임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한 육신에 조건에 묶이게 되면 모든 일들이 핑계거리에 불과해지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축복하는 예배와 말씀마저도 한갓 귀찮은 것일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들 중에 종교중독에 빠진 이들이 많다고 비판하지 않을 런지. 

 

성경의 교훈

 

열왕기의 역사들을 보라.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를 보라. 저들가운데 훌륭한 왕들이 몇 명되지 않는다. 40여명의 왕들 중에서 고작 솔로몬 이후 ‘요시야 여호사밧 히스기야 아사’ 정도의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 연약하고 한계 있는 이 땅의 왕이지만 저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준이 무엇인가? 저들이 통치할 때 백성들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왕들의 선과 악은 오직 한 가지 예배를 향한 자세로 구분된다. 예배가 온전한 왕, 주의 전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들과, 인간적인 생각들로 우상을 섬기기에 열심이었던 왕으로 분리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여름사역을 통해 매일 한권씩 66일 동안 성경을 강의하고 읽는 일을 하고 있다. 구약성경, 선지자의 피 끓는 외침을 오늘날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예배회복을 위한 목회자들의 외침으로 듣게 된다. 선지자들의 한 가지 사명이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 회개가 회복이며 축복이다.’ 

 

상실과 회복

 

사랑에 성실하신 하나님은 사랑에만 성실하신 분이 아니시다. 공의에도 성실하셔서 회복을 목표로 나아갈지라도 반드시 죄악을 갚으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이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어떻게 잘못하고 있으며 이를 돌이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하다면, 혹은 들을 곳이 없다면, 들어도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인터넷 방송의 스스로 선택지만을 찾는다면 회복의 길은 요원한 것이다. 스스로 성경을 읽지만, 성령의 임재 안에서 예배가운데 말씀을 들어야 한다. 교훈과 책망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바르게 되고 의롭게 되며 온전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감격을 상실한 성도의 삶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기대하기 어렵다. 감각이 없기에, 자신에 주어진 선물 같은 빛의 영광과 소금의 품격을 세상 앞에 던져버린다. 금송아지 앞에 가서 넙죽 엎드려 절하며, 그 입술에는 지절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금하시는 자리까지 나아가 범죄의 죄악 앞에 쓰러지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회복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비극이다.  

영혼의 은혜가 부재한 곳에 기름진 땅에서 나고 자라는 탐스런 작물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배를 받으시고 그의 영광을 세상에 빼앗기지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죄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을, 새롭게 기경함 없이 선한 열매를 달아주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북한이 일제 35년 분단 70년의 일을 지나면서 왜 아직도 이렇게 힘든 멍에를 메고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분명한 이유 중 한 가지는 1938년 27회 조선장로교 총회가 열린 평양에서의 신사참배 결의에 있다. 회개와 돌이킴이 없이, 그 땅을 온전케 하시기는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민족의 스승이었던 조만식 장로가 아닌 허구의 인물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김일성을 선택한 것이다. 공동체가 그런 지도자를 선택했다면 그 영향은 그 백성과 땅에 그대로 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택한 지도자에 의해 선택의 책임을 요구받는 것이다.  

 

예배와 삶의 성패

 

예배가 흥왕하고 영적인 은혜가 넘칠 때는 세상에도 기쁨과 감격이 넘쳤다,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평양 대부흥운동을 생각해보면 하늘의 기쁨이 땅의 즐거움이 된다. 영혼의 감격이 육신의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실수가 있다. 연약함이 있다. 그러므로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를 새롭게 교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주인 되어 하나님 없이 살던 인생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와 회복으로 축복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무너지게 되었을 때 그곳에는 삶을 새롭게 회복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결국은 삶의 피폐함이 증가되고, 세상의 정의를 무너뜨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를 나라의 지도자들이 생겨나 포학과 독재를 실행하게 된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배만 불리기에 여념이 없게 된다. 하나님 말씀의 다림줄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비그리스도인들만 죄를 범할까? 그렇지 않다. 예배에 실패한 성도, 심지어 목회자라 할지라도 영혼의 무너진 기초위에는 그 어떤 것도 바른 것을 세울 수 없다. 공의의 상실이 세상에 점점 더 강력하게 전파될 따름이다. 

 

예배와 사역의 회복 

 

코로나의 특이점은 모이지 못하게 만드는 염병이라는 사실이다. 전쟁과 재난 때에는 어려울수록 대통령부터 교회로 나아와 기도하기를 원했다. 교회를 찾게 만들고 기도하게 했다. 하나님의 회복을 맛보는 정도를 지났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이지 않게 만드는, 사단이 가장 좋아할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교회로 모이지를 않으니, 교회가 재정과 사역에 취약함을 드러낸다. 결국은 사역이 되지 못하는 영적 무기력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일해야 한다. 선교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일하면서 지나야 한다. 그런데 일하면 안되는 염병 앞에 비전과 꿈이 축소되어지고 마침내 여름가물에 쪼그라든 곡식마냥 빈 쭉정이밖에는 남을 것이 없다. 사는 길, 회복의 길이 무엇인가? 다시 교회로 와서 예배드리자고 더욱 외쳐야 한다. 말씀의 등불을 잡고 예배를 붙잡아야 한다. 

davidnjeon@yahoo.com

 

06.2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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