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성경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땅히 당하는 고난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타문화권 선교지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편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고난은 무엇인가? 따져보면 이민땅에서 먹고 살기에 버거운 마음에서 나타나는 삶의 고단함을 고난으로 오해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힘들다 어려운 것은 알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과 별로 상관이 없다. 그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의 힘겨움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각하는 그 고난의 자리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성경의 위로가 저들을 만족케 하거나 평안하게 하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고난의 순종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스스로 복종, 즉 자처한 고난이셨다.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 고난 앞에 온전히 순복하셨는데,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소망 없는 죄인을 향한 지극한 사랑 그것 때문이셨다. 영원한 죄악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향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이시기까지, 죄인들을 향해 당신의 사랑을 확정하신 인생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극진한 사랑, 그 자체가 바로 그분의 십자가 고난이셨던 것이다. 도무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인생의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망극한 것이다. 다른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은혜라는 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이 은혜 속에서 살고 은혜 속에서 죽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긴다.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를 닮은 고난의 십자가를 제척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의 가르침 때문에,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하여 그가 지신 십자가를 자원하고 자초하며 지고 가야한다. 이것마저도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드러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바로 그때, 그의 삶에 중심가운데 은혜가 샘솟듯 샘물처럼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하며, 그를 받아주시며, 그에게 공급되는 능력을 친히 맛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은혜를 요구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은혜를 간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은혜만 있으면, 은혜만으로, 은혜위의 은혜를 사모하며 노래한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은혜가 되기 위한 깊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그 감각이 둔하여져 있다. 고난과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 고난이 상관없으면 은혜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들의 고난이 무엇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게 되니, 억울한 감정으로 쏟아내는 통한의 눈물이 고난이다. 고난을 더듬어주기를 원하는 신령한 힘과 위로를 기대하지만, 욕심을 채우는데 소용될 은혜는 그 능력이 연약하기 그지없다. 나약한 인간으로서 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참된 은혜의 복을 누리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채워주어야 그것을 은혜로 알고 만족하게 여기고 섬긴다할 때에 그에게 고난과 은혜는 일종의 악세사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십자가 고난을 잊어버린 분주함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참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본다. 너무 분주한 세상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잠시 그 분주함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집중함으로 은혜를 회복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고독에서 새롭게 고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여정동안 온전한 고독을 감당하신 분이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시며 기도하실 때도, 주님은 홀로 그 깊은 고독을 감당하셨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40일을 금식하시며 홀로 고독한 광야를 지나셨고, 공생애 사역가운데서도 번잡하고 분주한 곳을 떠나 한적하고 조용한 시간을 통해 홀로 하나님 앞에 고독하게 서 계셨던 분이 주님이시다. 주님께는 왜 고독함이 필요했을까?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위해 십자가 충만한 은혜와 능력을 받아 누리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그런 고독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담대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잠시도 고독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흐름이 심각한 영적손해로 연결된다. 하나님을 단독으로 만나는 영적인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독함 속에서, 모든 사람의 도움을 멀리하고, 나의 의지할 이는 오직 주님 한분이심을 경험하며, 모든 고난을 감당하신 그리스도 앞에 사는 사람, 그가 비로소 주님의 온전한 사명자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이기는 힘-고독한 기도 예수님은 분주하게 몰려드는 일들을 뒤로하고 고독한 시간들을 통해 십자가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셨다. 예수님은 고독함 가운데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뜻을 물리치기 위하여 외롭게 홀로 간절히 기도하셨다.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고독한 기도가운데, 자신의 잔을 내려놓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잔을 들게 된 것이다. 고독함의 기도가 능력 있음은, 그런 순간들을 통해 내 뜻, 내 의지가 가득했던 분주한 그 마음을 평정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온전하게 설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모세혈관이 터질 만큼, 땀이 피처럼 흘러내릴 만큼 고통스런 기도의 순간들이었지만, 주님은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서-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아버지의 뜻 앞에 자신의 생명을 산제사로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복종할 능력을 고독한 기도를 통해 얻게 된 것이다.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분주한 삶에서 놓여져, 고독함속에 단독자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면하고 은혜를 회복하는 복된 기회를 얻어야 한다.
고난을 오해케하는 물질의 유혹 분주한 삶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라가는 참 은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인가? 결국 사람들이 고난이라고 착각하고 오해케 하는 일들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물질의 문제-돈의 유혹’이 있음을 본다. 물질중심적인 지금 같은 시대에, 말세의 어떤 대단한 핍박보다 더 순전한 믿음을 위협하는 요소로 '물질-돈'이 등장한다. 바울도 말세의 때에, 돈을 지나치게 사랑 하며 물질의 부요함을 통한 쾌락을 추구함에 대해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여도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세속적인 흐름에 대해 늘 시험당하며 넘어지는 것을 본다. 돈으로 권력을 사고, 돈만 있으면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얻기도 하고, 혹자는 교회를 통한 종교적인 성취의 즐거움도 돈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믿음 없는 사람의 말로 치부하기에는 가시처럼 걸리는 게 많다. 물질이 교회에 꽤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교회건축을 앞두고 직분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 직분은 신앙자체보다는, 곧 물질의 책임분담을 의미할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지음받은 교회를 허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어도, 기꺼이 주님의 말씀 때문에 고난의 자리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사명을 위해 지팡이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할 만큼 고난이 있을 것이나, 그가 바로 가장 복된 은혜를 누리는 영광스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삶의 다양한 부분이 물질욕심에 의해 오염되었음을 본다. 사역자의 삶에도, 목회에도 많은 오염된 흔적을 발견한다. 자신의 목회야망을 위해 성도들을 그릇 인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땅에 속한 물질의 유혹에서 자유하지 않으면 결단코 고난 그 너머에 있는 은혜를 붙들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두 가지 모두를 택할 수는 없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고난이 따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바울에 대하여,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6)고 하셨다. 택한 그릇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바울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설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었기에, 고난을 취하는 만큼 은혜는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고백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고난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의 분명한 고난 앞에 선명하게 삶을 세워가야 한다. 그가 깊은 은혜의 강을 지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니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복음의 결론은 이미 주신 승리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김을 주신 주님을 찬송하는 능력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자리에서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 주님을 해하러 달려오는 군병들이나, 닥쳐올 십자가나,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철없는 행동들은 주님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십자가 승리의 부활을 앞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미 주님은 승리를 맛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님의 입술에서는 찬미소리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삶의 어려움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삶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세상의 일로 당하는 고통을 주님의 고난으로 오해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욱 집중하는 삶,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복종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고난을 자처하라, 반드시 예비하신 은혜의 샘물을 마음껏 마시고 충만한 해갈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처럼 고난 앞에서도 노래하고 찬송하는 귀하고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