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교회중심, 신앙의 공동체성을 회복

-홀로족(族), 홀로신앙, 개인주의 신앙의 편협과 왜곡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최근 한국을 다녀오신 분의 말이다. 한국에서는 싱글, 즉 혼자서 한다는 의미의 혼술 혼밥, 혼자 술을 먹고 혼자 밥을 먹고,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지 않는 일명 ‘홀로족’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식당의 자리배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한다. 밥 먹는 자리가 벽을 바라보고 양쪽에 벽이 있어서 다른 사람과는 차단되고 벽에 걸린 자기만의 스크린에 몰두하며 혼자서 식사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잠자고 생활하는 곳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아파트나 각각의 방들이 연결된 하숙집 풍경은 사라지고, 한 공간에 혼자 사는 스튜디오가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그곳에서 인터넷 강국, 배달의 민족(?)답게 전화기 하나로 모든 음식과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면서 인생의 홀로 재미를 누리며 산다고 한다.

홀로 정보 - 그 편협과 왜곡성

그런 소식들을 들으면 창조로부터 더불어 살아가도록 남과 여, 부부를 허락하셨고, 더 나아가 가족과 사회공동체를 허락해 주셨는데, 이를 역기능 하여간다는 것에 상당히 부정적이 된다. 말씀에 역린하여 가는 이상 결코 긍정적일 수는 없지 않겠나?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 사회가 지극히 개인주의화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각자의 삶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한다. 아이들도 부모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미국의 독립된 자녀 세대처럼 독립적인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기호를 위해 일부러 혼자 나와 사는 미혼 자녀 세대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생각해보지만 답을 찾기가 어렵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답게 전체인구의 80%가 카카오톡이라는 메신저를 사용한다고 한다. 여기 저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카톡, 카톡’하며 쉴새 없이 울어댄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가장 손쉬운 소통의 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에 충실하여 불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실수와 부족함을 관용하고 이해하며 함께 세워져간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거늘, 너무나 익숙해진 개인 소통의 도구로 말미암아 자신과 타인의 생각의 교류보다는 더욱 강력한 자기 정보의 견고한 성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홀로 취하는 정보력의 한계

누구에게 물어서 알게 되는 겸손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고, 인격과 인격의 교통이 없어도 자신이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은 언제라도 취할 수 있다는 발달된 개인정보화의 시대에 인간 자신은 신이 세운 아름다운 교제의 질서마저도 역행하며 자기 재미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홀로 취하는 정보력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신념은 정보의 왜곡과 편협성을 쉽게 이끌어 온다. 거기에 덧붙여져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자료가 제공되고, 독자는 스스로 정당한 관점을 형성할 여지도 없이 선전광고물처럼 덮쳐오는 정보의 내용들 앞에 무작정 헌신하게 됨을 본다. 오늘날 한국의 극한 좌우갈등의 이면에도 이러한 자기 정보의 지나친 확실성에 기인한 면이 크다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언론, 내 생각을 교정할 수 없게 하는 내 생각대로 말해주는 언론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본다. 게다가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페이크(fake) 뉴스의 생산은 불에 기름을 붓는 꼴로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풍부한 자료를 주어도 이를 해석할 기준과 해석자의 함량이 미달이라면 그 정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관계성의 유익을 파괴

혼자 사는 게 익숙해지면 큰일이다. 아마도 그 다음에는 둘이 사는 게 불편해지고, 4-5명이 모여 산다는 게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고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이런 혼자만의 삶에 익숙하다보면 결혼에 대한 생각, 자녀생산에 대한 것도 지극히 자기편리를 위한 자기중심적이 됨을 볼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늦게 미루고, 직업도 일정하게 가지지 않고, 결혼을 하여도 자녀를 가지지 않거나 가져도 하나정도를 족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에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들은 아예 귀찮게 여기는 것이다. 이미 결혼한 기혼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혼자 살면서 부부관계를 이어가자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서로의 생활에 개입하지 말고, 그러나 20년 30년 같이 살았으니 이혼하지는 말자, 그러고는 각자 독립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게 더 변질되면 그냥 뭐든지 혼자, 이 사람하고 살다가 싫음 그만이고, 저 사람이랑 살다 싫음 그만이고, 뭐든 싫으면 그만인 죄의 습관과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삶으로 가지 않겠는가?

공동체의 삶이 축복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꼭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이다. 물론, 기성세대가 된 우리 세대에도 젊을 때는 어떻게 하든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고 그 잔소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지방에서 하숙을 하던 친구의 하숙방 자유가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무서움, 어머니의 잔소리, 어머니의 끝까지 자식에 대한 무한 애착, 이런 것들 때문에 감히 도전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려면 집을 나가야 하는데 나가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없기 때문에 가정공동체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가정 안에 붙들려 있었던 시간들이 복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밥상에서의 예의, 어른 존경, 아버지의 잔소리. 가정교육, 어른이 수저 놓을 때 그 때 놓고.... 그 분이 젓가락질 가지 않은 곳에 내가 갈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운 습관들이었는데, 이런 습관들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 예의를 지켜갈 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게 몸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어떤 교회를 가보면 담임목사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중직이란 분이 먼저 음식에 손을 대고 입에 넣는 경우를 본다. 그러면 그도 그 자녀들에게도 뭘 가르쳤는지 훤히 보이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자유라는 이름 앞에 가정교육도 받지 못한 것 아닌가? 자녀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홀로문화가 흥성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보여주어도 보는 이가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홀로신앙- 죄 가운데 노출

성경에 보면 대부분의 죄들이 혼자 있을 때 행해짐을 본다. 하와가 혼자 있을 때, 가룟 유다가 무리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때,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할 때 마귀는 다가와 유혹과 불신의 씨앗을 뿌린 것을 보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있을 때에 죄에 더욱 노출됨을 본다. 마귀가 혼자 있음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다. 다윗도 게으르게 혼자 있을 때, 전쟁에 불참을 하게 됐고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 더 나아가서, 정말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혼자만의 문화가 강해질 때 과연 이 아이들이 미래 교회 공동체의 삶은 어떨까를 생각해 본다. 그런 아이들의 교회생활은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운데 녹아지기도 쉽지 않고, 교회서 서로 협력하고 도우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됨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모여 있게 되면 부끄러워서라도 죄를 짓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의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교제하도록 지으셨다. 혼자 있게 하신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자리에 서고, 스스로 분리시켜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결코 신앙의 긍정적인 역할이 될 수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복

이러한 홀로족들의 삶은 점차 심화될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성인대우와 개척정신을 위한 실제적인 분리로서의 독립을 관습화하였는데, 우리는 이민자로서 상당조건이 불비한 가운데서도 모양만 흉내 내어 자녀에게 분리와 독립을 선물(?)하는 나쁜 예들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자녀들의 미래가 부모의 지도에서 벗어나 대단한 홍역을 치르는 가정들을 숱하게 보게 된다.

홀로족의 삶에 대해서는, 한국이던 미국이던 자녀들과 2세들을 바라볼 때 많은 기도가 필요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된다. 교회의 책임도 크다.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녹아져야 한다. 때로는 함께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을 지나기도 하고, 삶의 연약함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하겠지만 중보하고 기도하며 그렇게 나아가는 과정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가야 한다. 배우고 습득해가야 한다. 아이들을 교회에 맡기고 예배공동체 안에서 키워야 한다. 부모세대가 교회를 중심으로 살면서 자녀들에게 함께하는 가정, 함께하는 교회, 함께 교제하는 동역자들에 대한 좋은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말세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