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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멀리하게 만드는 일상(日常)의 문화류

-듣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교회 선교원 1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5세미만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기독교 교육, 특히 영재교육에 정통한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면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집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 들어야 하고, 잘 듣도록 자세와 태도를 바르게 해주는 것에 가장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잘 듣는 것에서 성장과 성숙을 기대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한다. 듣는 귀가 열리지 못하면 입도 열리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 혹은 들음의 종교라고 칭하듯이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믿음생활을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들음에서 구원의 믿음이 시작되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아이들의 자라나는 형태를 보면, ‘듣는 것’보다 지나치게 ‘보는 것’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음을 본다. 기독교 교육학자들이 듣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생각하는 훈련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기들은 이미 10개월 동안 엄마의 배속에서 듣기 훈련을 하고 세상에 태어나는데, 태중의 아이들은 보지 못하지만 듣는 소리로 그 소리의 색깔과 맛을 구별해낸다는 것이다. 말소리의 음색과 장단고저에 담겨있는 엄마의 감정이 고스란히 아기에게 전달되어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세상에서 평화로운 아기의 모습은 일정한 톤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엄마의 자장가 노래 소리와 마음중심이 담긴 기도소리, 그리고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 품에 안긴 모습이라고 한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

듣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들음으로 생각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보는 것으로도 생각의 기회를 얻게 되겠지만, 보는 것은 들음에 비해 생각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TV 등의 영상물에 지배되기 전, 교육이라는 것은 스스로 책을 읽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듣고 상상하며 생각하는 것이 큰 교육이었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잠언의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사고훈련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나이가 어려도 무척이나 생각이 진중하고 깊이가 있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어떠한가? 교회에서나 식당에서나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제 돌이 지났을까싶은 아이가 엄마 전화기를 붙잡고 스크린을 좌우로 움직이고 누르면서 머리를 집어넣어 몰두하듯이 집중한 채, 주변에 어른이 뭐라 해도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는 삼매경에 빠져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생각할 틈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생각의 틈을 가지기도 전에, 생각에 연결된 의도에 맞는 합당한 사진자료와 내용들이 풍성하게 주어지고 있으니, 더는 생각할 고민의 시간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생각 없는 행동과 감정주의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각의 시간이 짧아짐으로 말미암아, 생각 없는 즉각적인 행동들, 조급증,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얻지 못하면 반항과 같은 감정위주의 돌출행동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지 못함으로 예전보다 더 많은 사건사고의 증가를 보게 된다. 감정적인 돌발행동들은 성숙한 신앙의 삶을 방해하는 많은 실수를 만들어 낸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은 학생들의 모습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하고 놀라운 학습 자료들이 많음에도, 공부의 깊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점점 더 감각적이고 현실위주의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음악과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깊은 묵상을 드러내는 클래식 전공자들보다 당장 눈에 띄고 즐길 수 있는 실용적인 대중음악이 득세하는 것을 본다. 한국의 경우에는 점점 더 클래식 전공위주의 음악대학들이 없어지는 추세라고 한다. 각자의 기호를 따라가겠지만 더욱 감각적인 것에 취해가는 세대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색조화장(?)하는 10대들

최근의 한국 뉴스를 보면 한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화장하는 10대 청소년을 규제만 할 수는 없다고 보고 색조 화장품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리는 책자를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했다고 한다. 또한 올해 9월부터 만 13세 이하 초등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용 화장품’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화장하는 10대들이 늘어나면서 이를 막기보다 부모들이 화장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가르쳐야 한다는 추세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찬성하는 이유가 이제는 금지할 길이 없기에 긍정적인 통로를 열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과연 참된 긍정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성에 대한 욕구를 막을 길이 없어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피임기구의 사용을 솔선수범 가르쳐준다는 불가해한 일들의 연속이 아닐까? 청소년기의 연약한 피부의 손실이나 화장의 목적이 미용이기에 더욱 진한 화장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미래를 준비할 중요한 시기에 보다 중요하고 의미로운 것을 놓칠 수 있음은 그냥 새털처럼 가벼운 기우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왜 그럴까?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 속 깊은 곳에 외모지상주의, 보이는 것에 대한 부모들의 생각 없는 행동의 결과와 그 열매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세대가 생각의 재료가 되는 읽는 것과 듣는 것, 생각하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집중이 자녀세대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진리, 가치, 의미 이런 단어들을 전혀 생소하게 여기게 만드는 환경이 아이들까지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속의 역설

이러한 보여짐의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방송이다. 한국의 방송을 보면 자주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10대와 20대 초반의 아이들이 무대에 나와서 아이돌 걸그룹이라고 노래와 춤을 추는데, 그 선정적인 모습에 얼굴이 화끈했다. 옷을 입은 것이나, 저들의 춤이 성적행위를 상징한 것이 많은데, 과연 저렇게 춤을 추는 저 어린아이들은 저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하는지 답답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노래가사가 문제였는데, 이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에 보이는 감각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번뜻 생각이 든다. 저 아이들의 부모는 딸들이 저런 곳에서 옷을 저렇게 입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성적인 것을 어필하는 저 행동들을 과연 부모는 알고 있을까? 안다면 자기 딸을 저런 자리에 세워두고 싶을까? 옆에 있던 선생님이 한마디 거든다. 그런 일에 자식들을 세우고자 엄마 아빠들이 도시락 싸들고 덤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자 아이돌은 진한 색조화장에 귀걸이에 여자치마를 입고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아이나 부모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손가락의 힘으로 무장한 현대인

생각하는 것을 멀리하는 일상의 일들의 이면에 인터넷 문화가 있다. 의문이 생기면 생각을 하고, 인식의 기본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생각을 하면서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터치하는 힘이 곧 지식이 되는 것이다.

손가락의 힘으로 무장한 현대인은 보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일상의 삶, 이로 인해 생각 없는 즉각적인 감정의 표현에 몰입된 인간으로 진화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인 이슈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실과 진실의 문제를 생각하고 추론하여 가장 보편타당한 답을 얻어야 함에도, 분별의 과정 없이 먼저 분노하고 보는 것이다. 그 분노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었을 때, 혹자가 질문을 해본다. 왜 그랬느냐고? 돌아오는 답은 스스로의 의지적 결론에 대한 확신 없이 ‘누군가 카더라’는 답만이 돌아온다.

세상 속에서-겉사람과 속사람

듣고 생각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우선하고, 감정중심의 가치관이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중심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예전에는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음 판에 새기며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강단에서 뭔가를 자극하고 보여주기를 원한다. 게임이나 인터넷 놀이를 위해서는 한두 시간은 아무런 문제가 아닐 텐데, 귀하고 소중한 예배의 한 시간을 그 조급증이 견디지 못하게 한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늘 같은 목회자, 같은 성경말씀, 같은 음색과 음조이기에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왔지만, 듣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감성주의의 흐름에 마음과 몸을 맡기는 것이다.

성경은 겉사람과 속사람을 말한다. 겉사람은 후패할 것이나 속사람은 은혜 안에 날마다 새롭게 된다고 한다(고후4:16). 겉사람은 보여지는 것이다.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 좌우되는 삶의 모습이다. 곧 썩어 후패하여질 것이다. 속사람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영혼의 모습을 의미한다. 즉, 겉사람은 ‘육신’을 속사람은 ‘거듭난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며 하나님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눈에 보여지는 썩을 것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사람이다. 후패하여 버려질 육신에 초점 맞추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는 오직 말씀을 들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날마다 그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그 일에 초점 맞추어 사는 이, 그가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구별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이다. 날마다 그 영혼이 주님 안에 새롭게 되는 삶, 그 삶을 살아가고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성도의 거룩한 책임을 다하는 이가 세상속의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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