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말의 전쟁–설전(舌戰) 조국 대한민국의 현실을 떠올려 보면 우울증 증세를 넘어서 이젠 질식할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좌우의 입장차이로 나누어진 현실이, 언젠가는 하나로 통합될 날이 올 것이라 기다려보지만 과연 그날이 온다할지라도 지금같이 끝장을 볼 것처럼 싸운다면 과연 온전한 통합이 이루어질까를 생각해본다. 목숨 걸고 싸운 이후의 그 뒷감당이란 것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마음이 밝지 않다. 둘이 사랑해서 가정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서로의 부족함으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사랑만큼 미움이 깊을 수 있지만,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서로 같이 죽을 것 같이 끝장 볼 듯 행동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밉고 싫어도 아이의 아빠이고 엄마라는 사실 때문이다. 국가 공동체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정치 이념에 의해 나뉘어지고 갈등할 수 있어도, 신불신을 막론하고 건드릴 수 없는 인간자체의 격으로 말미암는 존엄이 있을 것이고, 아무리 싸워도 국가의 존재 자체의 존립에 대한 문제라면 그 유익을 다시 따져보는 위기가운데 빛나는 공동체성이 있을 것인데,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최근 모 국회의원의 대통령의 사진을 누드화에 패러디하고, 이에 대해 그 국회의원의 부인과 자녀들을 누드 그림에 다시 덧붙이고, 이로 인해 신문과 방송의 혀들이 대서특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면 정말 저질스런 정치의 수준과 감정적인 엉겨붙음의 화풀이 앞에 그만 넋을 잃게 만든다.
부지중 훈련교육–오해와 갈등 어쩔 수 없는 갈등관계에 놓인 공동체라 하여도 여기서 망하고 죽을 것처럼 끝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혀의 전쟁, 설전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민들은 은연중에 한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계속 훈련되고 교육되어 진다. 그래서 방송과 신문의 말들이 전해주는 것을 받아먹으면서 점점 더 자신의 논리에 무장에 무장을 거듭하면서 이젠 그 어떤 정당한 판결에 대해서도 저항할 나름의 무기들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당시의 고위직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변증을 이어가신다. 가장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저들의 올무와 함정을 피해가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주님은 저들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책망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해가 무엇인가? 이해가 오류를 범하는 것인데 이해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주님에게 그 나머지를 맞추어내라고 요구하니, 온전한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각자가 원하는 기준을 가지고 말을 듣고 말을 하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기준의 내용이 아니면 즉시 즉각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고 더 나아가 목숨 걸고 싸울 듯이 맹렬히 타오르는 불을 만들어 버린다.
사실과 진실 한국의 많은 방송과 신문들이 지나친 경쟁 탓인지, 특별하지도 않은 작은 팩트를 부풀려서 단독보도의 이름으로 세상 앞에 드러내는 것을 본다. 또한 이를 인용하는 또 다른 확대해석과 판단이 번식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결론의 진실함을 찾아보기도 전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골라잡아서 주장에 주장을 거듭하는 것이다. 특별히 제목자체가 너무나 선정적이고 주목하게 만든다.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제목과의 일치성이 거의 10%도 되지 않음을 본다. 그렇게 한참한참 뜯어 먹은 후에 사실이 잘못된 것이라 밝혀져도, 자신들의 기사가 오보였고 잘못된 결론이었음에도 아무런 정당한 사과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본다. 후안무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결국 선진국 문명사회를 살고 있다하여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아주 고급스런 이기적 존재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인간은 불완전하기 그지없기에 충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인간됨이란 것이 무엇인가? 잘못에 대한 분명한 인정, 사과 그리고 새로운 출발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실종된 채, 진영의 논리로 무장한 세력들은 지금도 혀의 전쟁 설전 레이스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남의 일-싸움구경 어떤 이들은 한류 드라마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게 작금의 한국에서 벌어지는 총칼 없는 싸움구경이라는 식으로 농담 삼아 말한다. 그러나 이 싸움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의 게임놀이 같은 일들이 아니라, 하나뿐인 조국에 대한 일이기에 참람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현재 조국에서 살아가면서 직접 현실에 접하고 있는 지인들 가운데는 심각한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자기 기준에 의해 일희일비하며 요동치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실의 숙명론에서 이젠 체념하여 무감각을 향해 가는 자신을 한탄하는 것을 듣게 된다. 멀리 태평양 건너 직접적인 일들에서는 비록 떠나있으나 타국에서 바라보는 이러한 조국의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절망에 갇히게 만든다. 그런 절망스런 마음이 들 때, 애써 부르짖으며 기도하며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보려고 한다. 가령 예를 든다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할 때, 내가 아닌 성도들에게 나타난 문제라고 할 때, 목사인 나는 심방을 갈 것이고, 가서는 분명히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가 나를 심방하며 위로하고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는 기회를 가진다.
공동체를 허무는 말의 전쟁을 피하는 길 가정과 교회 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불협화음, 갈등과 분쟁의 중요한 자리에 쓰여지는 사단의 도구가 ‘세치 혀-말(言) 그리고 확장된 말로서의 언론’임은 부인할 수 없다. 말로서 찌르고 찔리는 가운데 수많은 생명 없는 논쟁과 정죄와 판단의 말들 속에서 공동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을 겪는 것이다. 말 혹은 오염된 언론으로 인한 공동체의 분쟁의 분명한 손해는 결국 구성원에게 돌아온다. 반대로 언어가 분명하고 정직하고 진실하며, 언론 또한 공명정대함을 다할 때에 공동체는 건강함을 통해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언론의 문제도 사람들의 행위와 말로 인해 발생한다 할 때에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언어에 대해 몇 가지를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1. 복된 입술은 자신과 공동체를 구한다. 어려운 때에 모세처럼 기도의 언어를 갖고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음으로 자신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살리는 귀한 역사를 소원하라 2. 말은 씨가 된다. 말은 인생과 가정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말은 신앙의 표현이다. 지도층이 부정적인 원망의 언어를 버리고 소망의 언어·긍정의 언어·믿음의 언어를 선포해야 한다. 3. 타인의 단점을 잘 찾아 말하는 것이 정의는 아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잘 찾는 것을 정의. 혹은 깊은 영성이나 통찰력으로 오해하지 말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 바로 앞에서는 동의를 하고, 참 똑똑한 생각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돌아서면 더 이상 교제할 수 없는 피해야 할 사람으로 피하게 된다.
4. 언어가 머리속에 갇혀 있을 때 ‘생각’이라고 한다. 그 생각이 밖으로 드러날 때 ‘말’이라고 하며, 말을 구체적인 동작을 통해 열매로 표현할 때 그것을 ‘행동’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의 열매를 달아보신다 할 때, 그것은 우리 삶의 내용 가운데 행동만 달아보심이 아니다. 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흘러가서 열매를 맺었다면 나의 입술의 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물으실 것이다. 5.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도록 노력하라. 말이 급한 사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말이 급한 대화가 공동체를 어려움에 몰아간다.
6. ‘무슨 말을 들을지라도,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이며’라고 기도하라.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의 왕성한 번식력을 생각하면서, 자기에게서 자가 번식이 그쳐지도록 아파도 상처가 안될 만큼 강건해지기를 기도하라.
7. 사랑으로 덮지 못할 허물의 내용이라면 구태여 알려고 하지 말라. 본인이 책임질 수 없는 말이라면, 상대방의 허물을 듣고서 그 허물을 덮을 만큼의 사랑이 없다면, 궁금해 하지도 말라. 8. 말을 전하는 통로로 나의 입술이 사용되지 않도록 늘 노력하고 기도하라. 축복의 말, 감사의 말, 긍정적인 말을 더 많이 하도록 의도적으로 애를 써야 한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언어 속에 가장먼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질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9. 하나님이 나중에 나를 대신해서 변호할 날을 기다리며, 억울하고 속상한 일에도 인내하라. 자신에 관련된 말들을 들을 때가 있을 것이다. 밝히려고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신원하시기를 기다려보라. 10. 긴 여백과 긴 침묵의 미덕을 배워보라. 하나님이 여실 때까지…. 말하기의 기도의 아닌, 듣는 기도를 잘 드리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이다. 하루의 짬짬이 틈을 내어서 침묵하는 연습을 하라.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