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유약하고 수동적인 삶 서점가의 주요 베스트셀러들은 그 시대 사회적 세태를 반영한다. 최근 한국 서점가에서는 항 우울제와 같은 세상살이에 대한 수동적인 순응과 이해를 가르치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사랑, 관계, 만남 등의 삶과 아주 친숙한 소재의 솜사탕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에 쉽게 빠져들도록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혹자의 표현을 빌리면, 단 한 시간가량의 깊이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로, 생각의 여과를 생략해버린 채 즉각적인 감동에만 머물도록 하는 감성표피만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근자에 들어오는 유학생들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 그러한 세태가 그대로 녹아져 있음을 보게 된다. 예전에 비해 진취적이지 못하고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변모해감을 보는 것이다. 풍랑 많은 인생임에도 삶의 고난과 역경에 힘있게 맞서는 야성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야성이 부재한 시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렵고 힘들면, 부르짖어 기도하고 찬양하며, 고난의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하는데 그런 영적인 야성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에 순응함에 빠른 걸음들을 보인다.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 말씀을 받아먹으면 그 속에 꿈과 소망이 있음을 깨닫게 될 터인데, 그러한 길을 보여주는 이도 따라가는 이도 보기가 어렵다. 말씀 안에 받은 꿈과 소망 때문에, 단 하루도 꿈 없이 잠들지 않고 꿈 없이 깨지 않는 복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터인데, 영혼에 들은 바가 없으니 기대감도 없고, 기대감이 없으니 기도도 없는 영적부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말씀을 받으면 꿈과 환상과 비전을 보는 동시에 험한 세상가운데서 스스로 그 위대한 꿈을 이룰 능력이 없음을 보면서 절망한다. 그러나 그 절망은 하나님이 주신 꿈 앞에서 회복을 위한 기도로 전향된다. 주님 주신 꿈이 너무나 위대하고 커서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있기에, 밤을 새워 주께 그 꿈을 이루어달라고 의탁하게 되고, 마침내 밤을 새워 기도하며 인생의 위대한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야성이다.
입맛에 맞는 위로-동냥젖 오늘날의 시대는 이러한 영적야성의 부재를 보게 만든다. 혹자에게, 당신은 풍랑 많은 인생의 밤에 그 풍랑을 밟고 찾아오실 주님 안에서 인생의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는가? 물어보면 대개 공통의 답을 말한다. ‘나에게 영적인 것을 말하지 마세요, 살아 있음의 순간순간이 고통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잔뜩 고통과 절망에 짓눌린 채로 ‘아프다’고 말하기에 급급하면서 그 아픔에 대한 위로만을 찾아 피하기에 급급할 뿐, 그 고통의 풍랑을 허용하시고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디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더욱 재촉하는 일들이 오늘날 인터넷 문명 속에서 동냥젖에 의지하는 신앙생활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유를 사고파는 ‘동냥젖’이 세간에 알려졌다.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하며 면역력을 높이고 소화 흡수에 좋은 모유를 인터넷에서 구입해 먹이는 일들이 엄마들에게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행동이다. 바이러스 감염 등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면역력이 취약한 신생아들에게는 한층 더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세계에도, 말씀의 진지한 배움 없이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마구잡이로 설교를 선택하거나 다운 받아 듣는 설교동냥 행위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건강에 유익하지 못함은 불을 보듯 뻔 한 것이다.
세상은 온통 고단한 인생길의 연속 고통의 문제에 대해 피한다고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 각지를 다녀 봐도 이 세상에 안전한 위로만을 제공해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음을 본다. 한국에서는 젊은 청춘이어도 일할 곳이 없고, 취직이 되어도 바람 앞에 등불 같아서 스트레스가 많음을 고백한다. 중국에 가보면, 해안선을 따라 발달된 몇몇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삶의 질 자체가 한국의 수십년 전과같이 대단히 척박함을 본다. 인도는 높은 빌딩사이로 개, 소, 돼지가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손에 든 물병하나로 대소변을 해결함을 본다. 필리핀은, 선망하는 직업중의 하나가 빌딩 앞에 총을 들고 지키는 가디언의 삶이며, 영국은 모든 것이 소규모로 비싸게 움직여야 하는, 이제는 기울어지는 해를 보는 느낌의 나라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한국, 중국, 영국, 인도, 필리핀... 등등 그 어느 곳에도 인생자체는 소망이 부재하지만, 주님으로 인해 작지만 밝은 소망의 빛이 어둠속에 영롱하게 존재함을 본다. 그 빛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말씀과 기도, 예배의 영적 생기를 회복하는 곳에 있더라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 앞에서 즉각적인 위로만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 어떤 곳에서 어떤 고통의 일을 만나도 담대하게 이를 다룰 수 있는 영적야성의 강건함이 절망의 자리에 빛이 되더라는 것이다.
세상에 방임하지 않는 영적회복 인도의 밤에는 노숙자들이 심각한 일교차에도 자신의 몸을 가눌 여건이 없어서 내팽개치듯이 길가에 누워 있다. 그런데 그 어두운 인도의 밤에 1-2불하는 담요를 들고서 그들의 육신의 고단함을 덮으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이 있다. 이 일에 같이 헌신하는 현지인들도 있음을 본다. 같은 고통의 밤하늘아래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이로 저들의 문제를 설명하기는 심히 부족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세상은 가진 것으로만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가보면 말씀과 기도와 예배로 인한 영혼의 기쁨과 살아있음이, 비록 척박한 흙바닥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임에도 감격에 찬 웃음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본다. 아무런 찬양의 도구나 현대의 문명의 도구를 가지지 못한 채 필자의 수십년 전 어린 시절 교회당보다 못한 형편임에도, 저들은 자신을 광야 같은 인생에 방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붙들린 채 예비하신 영원한 승리를 향해 진일보하더라는 것이다.
환경과 조건이 아님 환경과 조건의 유무가 많은 부분 인생의 승패를 예단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절대적이지 못함을 분명히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문제가 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더 강단 있는 분으로 평가되던 그분의 영적인 피폐함이 얼마나 크게 온 국민에게 상처로 드러나고, 본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불명예를 안아주었겠는가 하는 것을 보면, 인생의 승리는 결코 세상의 좋은 조건 긁어모으기에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영이 육을 지배함을 증거 한다. 영적감각을 회복해야 함을 말한다.
어떤 것보다, 예배와 말씀의 감격이 회복되어야 하며 영적인 부분이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해결되어야 함을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고통을 피하는 조건으로 타협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찬송을 하여도 빠져들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영혼의 울림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잠오지 않는 밤에 수면제로 좋다는 이상한 간증자의 삶을 살아서는 곤란한 것이다.
말씀에 대한 앎, 신앙의 고백, 거룩한 결단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이 30%, 감정의 영향이 70%를 차지한다. 사람은 아는 데로 배운 대로 살아가기보다, 감정과 기분대로 살아가는 존재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서 마음이 안 내켜서, 기분 나빠서 안하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기분이나 감정의 요인보다는 말씀에 대한 앎과 신앙의 고백 그리고 거룩한 결단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가고 싶어서 가는 길이 아니라, 가야하니까, 가는 것이 옳으니까... 그래서 결심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분량 영적인 본질회복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인생은 잎은 무성하고 열매도 잔뜩 달려있지만 쓸모없는 것들로만 가득 찬 돌배나무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열매 없는 지루한 신앙생활의 여정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고통과 고난의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문제에 매이지 마라. 당장 인생이 끝날 것 같지만, 죽고 사는 것 흥망성쇠는 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린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죽을 것인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 사업의 문제 있을 때 마다, 접고 창업만 할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개미들에게는 파인애플 떨어지는 소리가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된다. 믿음의 분량이 문제 앞에 호들갑 떨지 않게 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음의 담대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세상의 문제 앞에 호들갑떨지 않게 된다.
말씀과 성령, 섭리의 손길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세상을 향한 자신의 눈–고집스런 불신앙의 관점의 늪에 빠져드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예리한 영적감각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의 神지식(Knowing God)과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맡기는 기도의 영성은, 문제 속에서 자신을 떼어내어 하나님의 눈으로 문제를 다루게 한다. 그것을 ‘섭리적 해석’ 혹은 쉽게 ‘하나님의 손과 눈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삶의 문제를 아름답고 향기 나게 주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빚어가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손/눈)의 역사이다. 말씀을 아는 자에게 성령을 의지하는 자에게 이 비밀을 보여주신다. 마침내 풍랑 많은 인생의 고통의 문제 앞에서 기분따라-감정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 안에서 축복의 열매를 맛보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것이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