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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과 거역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하나님 세우신 질서와 권위의 회복-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하나님 만드신 원 세상은 질서와 조화를 통한 아름답고 넉넉한 자유의 축복이 있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새를 만드시기 전에 하늘궁창을 열어두셨고, 물고기를 만드시기 전에는 바다를 먼저 만들어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후에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참된 만족으로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네 입을 넓게 열라’ 하신 후에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만약 입도 열지 않았는데, 먹을 것을 넣어 주려하면 얼마나 낭패스런 일이 발생할 것인가? 하나님은 준비된 그릇위에 복을 담아주시듯이 모든 것을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시다.

눈을 열어 세상을 보노라면

미국과 우리 조국 한국 그리고 보이지 않게 치러지는 전투와 같은 삶의 현장을 보노라면, 눈을 열어 세상과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무척 고통스럽다. 애써 복음 안에 담겨진 소망과 사랑의 은총을 붙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청교도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다운 품격들을 내쳐버리고 지저분한 선거전을 이어가고 있다. 인생의 악과 죄를 고스란히 영적인 필터 없이 쏟아내는 것을 보노라면 미국시민의 전통적인 자존감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대통령을 하고자 하는 최고지도자들의 덕목과 부합되지 않는, 대통령이 된다 하여도 좋지 않은 추억으로 국민을 갈라놓을 것 같은 일들이,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시궁창 오물처럼 쏟아내는 것을 본다.

최근 방문했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보아도 비슷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눈에 분명한 부정과 부패를 고집스러움으로 지켜내는 안타까움을 보게 된다. 오리무중 수수께끼 속에 감춘 듯한 비밀스런 재단과 그 배후세력에 대해서 국민은 점점 더 혼란의 가중함만을 느끼고 있다. 어느 농민의 무리한 죽음으로 말미암는 정치인과 의료인 등 최고 엘리트들의 합리적이지 못한 고집스런 말의 전쟁들도 톡톡히 그 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 혹자는 한국의 상황들을 2017년이 정유년이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이어 재점화시킨 정유재란을 앞에 둔 풍전등화의 말로서 한국사회를 설명하기도 한다.

세상에 비해 가정과 교회는 어떠한가? 가정과 교회의 질서와 권위의 무너짐 현상도 이제는 많기에 부정적인 측면도 많을 수 있는 미국이나 한국뿐 아니라, 세계각지의 한인교회와 선교지에서도 비일비재한 심각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을 본다.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찾아보기 어렵고, 영적인 질서를 새롭게 하는 교회와 예배에 대한 형식과 질서를 거부하는 일 또한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게 나타나고 있다. 영육 간에 혼돈된 시대 그 자체를 살아가는 것이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세상과 삶의 혼돈의 정점에 이기적 개인주의의 고집스러움으로 무장한 인간 능력자가 존재하고,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 삶을 질서지우지 못하는 방종이 있음을 보게 된다. 외적으로는 모두가 어느 한 교회의 구성원이고, 교회간판의 타이틀을 걸고서 세상출세도 하고 리더십을 얻을 기회를 가졌겠지만, 저들의 속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모양은 회칠을 몇 번이나 해서 번듯하고 괜찮아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도발적으로 반응하는 모습들일 따름이다. 옳음과 틀림, 좋음과 나쁨, 그러한 것에 대한 구별의 함량이 부족하면 은혜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선(善) 질서에 항복하면 참 자유가 있을 것인데 이 또한 외면한다. 오직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와 파괴적이고 저질적인 고집과 혼돈에 자신과 상대, 공동체를 방치하며 살기를 좋아한다.

그 본질이 무엇인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순종의 영이 아닌, 신불신을 막론하고 그 출발에 불순종의 영이 배후세력이며 이들과의 영적전쟁터가 세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단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엡2:2). 사단은 하나님 지으신 세상의 운행에 대해 그의 권위와 질서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생각을 기준으로 마음의 방향대로 감성의 방종을 사용하도록 유혹한다. 이기적인 목적과 욕심을 위한 고집스러움에 자신을 방치하게 만든다.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의 존귀한 삶을 지워내고, 저들 속에 숨어있는 회복되지 못한 죄성들과 성화의 과정을 지나야할 죄의 불순물들을 여과 없이 토해내게 만들어 멸망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의 거역의 불순종

권위와 질서를 해치는 가장 기본단위는 가정에서의 부모에 대한 불순종의 거역이다.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의 말씀은, 단순히 너를 낳아준 부모에게 옷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는 그런 차원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 속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땅의 축복들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고 누리라는 축복의 계명이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함으로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효도하는 훈련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에 대한 불순종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참되게 순종하며 겸손히 거하는 삶과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에 대한 순복은 예비된 축복의 열매로 드러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 하였다. 아브라함에게 피해갈 수 없도록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사흘길을 가게 된다. 여기에 생각이 머문다. 사흘길을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설 수 있는 순종의 자녀, 제단에 묶인 채로 아버지의 칼을 기다릴 수 있는 아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말씀에 따라 땅에서 잘되고 장수의 축복하심은 분명한 질서의 순복에 대한 열매가 분명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의 이 말씀을 얼마나 넘어서고 있는가? 특별히 부모는 눈에 없고 제 자식밖에 보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늘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교회와 예배의 형식과 질서

하나님 세우신 질서와 권위에 대한 파괴의 초점은 교회와 예배에 맞춰진다. 성도의 영적인 무너짐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단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구태여 교회를 갈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는데, 꼭 교회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집에서 예배드릴 뿐 아니라 이제는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예배로부터의 탈출을 선언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구별되게 예배드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불순종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적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 참된 교회와 예배에는 사람의 편리를 따르지 않는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형식이 있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세대가운데 질서와 형식을 말하면 율법주의처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교회를 향한 서신서들을 보면 교회는 성도가 기꺼이 순복해야 될 분명한 질서와 권위, 형식이 존재함을 말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예배자로 나아올 때, 1년된 수컷으로 흠이 없는 것 등등.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주의 전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가 있음을 말한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분명한 형식과 질서를 따라 드려야 한다. 기준이 있을 때, 변화와 적용의 원리도 나타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온전한 예배에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거부

목회자와 성도에게 주님이 주신 사명은 다르다. 성경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계층과 계급적 차별이 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질서가 있고 구별이 있어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 질서가 깨어지면 예배가 깨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너와 나를 강조하면 파당을 짓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구별을 강조하면, 거룩한 공동체로 집약이 되고 교회는 복된 은혜를 누리게 된다. 영적 지도자를 세우고 따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사단이 틈타기 좋은 통로가 된다. 예배인도자를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 결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리고 예배가 무너지면 자연적으로 교회도 무너지게 된다. 그 결말이 무엇인가? 허물어지는 교회의 기초위에 몰락의 위기가운데 회개할 일들만 쌓아가게 될 것 분명하다.

육신의 아버지가 육의 양식을 공급하듯이, 주의 종들은 성도들의 영적양식을 공급하는 영적 아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전의 믿음의 삶에 지극히 성실하였던 분들의 신앙은 이와 같았다. 가정에도 질서가 있을 때, 지금은 어려워도 미래가 있듯이 교회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반차가 분명히 있고 이것을 온전히 쫓을 때 교회와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의 종들이 영적 아비의 위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버지됨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설득해서 아버지가 될 수 있겠는가? 자식에게 내가 아버지라고 설득시키는 아버지는 너무나 불행하지 않은가? 그러나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가르치고 순복되어야 할 난제중의 난제가 바로 주의 종의 권위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 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권위와 질서에 대한 자의적 해석

말세의 시대에 사단은 인생으로 하여금, 마음 가는 대로 멋대로 행동하라고 역사한다. 태생적 질서에 의해 규정된 어른에 대해,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말씀에 대해, 성경과 교회의 권위에 대해 순종하는 것은 못난 것이며 모자라는 것이고, 마음껏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이 더 발전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자기가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관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부족하거나 비참하게 하셔서 어렵고 고통스런 삶의 여정을 지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사단의 종노릇하며 불순종하는 본성에서 온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적 세력의 문제인 것이다.

삶속에서, 미국과 우리 조국 한국 땅에서,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 간에 얼마나 많은 혼돈이 있는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질서 안에서 권위와 질서에 순복하는 복된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힘써 영적전투를 치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예민한 감각 속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권위와 질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귀한 복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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