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아무리 큰 말(馬)이라 하더라도 재갈 하나로 좌우할 수 있듯이, 인생의 흥망성쇠도 작은 세치 혀에 의해서 좌우됨을 성경은 교훈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용사들과 범죄하여 패망하는 인생의 일들 사이에 세치 혀의 권세가 있음을 보게 된다. 신앙과 불신앙 - 입술의 열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홍해의 기적 후에도 단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마시는 물’의 문제로 하나님과 모세를 불신하여 넘어지게 된다. 받은 은혜에 비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데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이처럼 인간에게 허락된 세치 혀는 기회만 되면 원망과 불평의 말을 쏟아냄으로서 스스로를 망하는 자리에 나아가도록 한다.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그 사람의 내어뱉는 말들이 그의 신앙인격과 삶을 가장 잘 대표한다. 성경의 시대나 지금이나 믿음의 성숙함을 소유한 이들의 한결같은 모습은 입술이 절제되고 근신된 이들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시141:3)고 소원하였으며, 세치 혀를 악한 것과 입술의 궤사한 말들에서 금할 것(시34:13)과 자신의 혀로 범죄치 않기 위해 악인이 자신의 앞에 있을 때에는 차라리 자기 입에 재갈을 먹일 정도로(시39:1) 근신하며 주의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였음을 보게 된다. 신앙의 삶에서 입술의 범죄함에 대한 진지하고 치밀한 성찰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말과 공동체 마시는 물의 문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힘을 빼는 탄식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모세는 확실히 달랐다. 백성들을 향해 말하기에 앞서, 그는 먼저 하나님께로 달려가 기도의 언어로 자신의 심정을 내어 놓게 된다. 그는 입술을 절제하며 간절히 기도했고,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마실 물로 인해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여 주신다. 모세의 믿음의 말과 기도는 자신도 살고 백성들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 것이다. 어려운 때 원망의 말을 하기 쉽다. 그러나 그때 멈추어야 한다. 모세처럼 기도의 언어를 갖고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살리는 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민 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이민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일들 가운데 불신앙적인 입술의 말들이 그 근원 샘물이 됨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저주와 원망의 말 세상은 생명체와 같은 죄의 전염성으로 인해 그 열매가 사망을 향해 달려감을 보게 된다. 그 언어들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 속에서 리더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이민사회 속에서 쉽게 보게 되는 말과 소문(?)의 해악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마음을 가지게 된다. 교회와 가정과 삶의 영역가운데 선하지 않은 말들의 씨앗이 자라 파생하는 문제들은 그 열매가 대단히 충격적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장 주의하고 훈련되어야 할 부분 가운데 말의 습관이 있다. 그 가운데 부정적인 저주의 말과 원망의 말들이 개인과 공동체를 해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어려운 이민생활을 지나면서, 생각만큼 되지 않는 일들로 말미암는 후회가 누군가를 탓하는 저주와 부정적인 말로 쉽게 드러남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경고하는가? 시편109:17을 보면, 저주하는 사람은 곧 자기 자신이 저주의 대상이 됨이라고 말씀한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저주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혹여 옆에서 누가 저주하는 말을 하면, 그것을 멈추도록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불신앙의 언어는 원망의 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후 광야에서 실패와 죽음의 이유를 ‘원망하여 가로되’라고 간결하게 증거한다. 소망 없는 핍절한 인생의 단점이 원망이다. 젊어서 부모를 원망하던 사람은 나중에는 자식을 원망하게 된다. 결국 평생 다른 사람 원망하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경에 ‘원망치 아니하면 멸망을 피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원망하는 삶은 멸망 받아 마땅한 삶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리더로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특별히 교회의 일을 맡아서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원망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쓰임 받을 수 없고 멸망받기 때문이다. 원망이 입에 늘 있는 사람은 스스로 교회에 중직도 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곧 멸망 받을 사람이 교회의 중직이 되어 함께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말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하나님의 사람은 혀의 권세, 말의 권세를 인정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큰 복이 됨을 인식해야 한다. 세치 혀로 행하는 말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면서, 예비하신 축복을 스스로 내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쉽고 가까운 생활의 말들에서 부터 말과 혀의 권세를 인정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잠언 13장 2절에 ‘사람은 입의 열매로 복록을 누린다’고 말씀한다. 세상 사람들도, 말 한마디에 복이 나간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어른들은 말이 많고 헤픈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말에 부주의한 사람은 혀의 권세를 알지 못하기에 복된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저주와 원망의 말과 더불어 삶에서 우리는 입술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는 영적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과 그의 세우신 몸된 교회에 대한 말들은 극히 주의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3계명을 지키기 위해, ‘여호와’라는 본래의 이름자체를 부르지 않았고, 다른 별칭으로 불렀다. 그렇다고 3계명이 무조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고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것 때문이다. 경망스럽고 허탄함과 무익함으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절대 농담거리 혹은 장난거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특권이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고 정당하지 않는 것에 사용할 때는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행위로 취급하여 반드시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 신자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언어를 사용함이 중대한 범죄가 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경망스럽게 사용하여 입술로 범죄 하는 것은 은혜를 배반하는 일이며 결코 용납이 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죄’를 물으시겠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를 말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우리는 그 이름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예배로 모일 때, 시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소중한 약속인데, 그것을 지키지 못함은 그의 이름 곧 그의 인격과 거룩성에 대한 중요한 훼손이 되는 것이다. 또한 담배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술이 취해서 신앙적인 논쟁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횡설수설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술판의 안주거리가 되어질 때 결코, 옳은 것이 되지못함을 말한다. 특별히, 세상모임에 가서 별로 은혜가 되지 않는 자리이면 교회얘기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의 조롱어를 신자가 사용 오늘날 인터넷의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 매체가운데 이 시대의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를 비판하거나 교회 사건사고를 다루고 사용함에 있어서 세상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기독이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인데, 세상에서 이를 비하하는 말로 ‘개독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목사에 대해서는 ‘먹사’ 등 신자의 입에서 세상이 신자와 교회를 비판하는 말을 같이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조롱하는 말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그 정의감을 칭찬하실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어도, 그 표현이 거칠어 질 때 본질적인 내용의 의도가 훼손됨을 본다. 언어는 생각속에 잠재된 삶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데, 거친 신앙의 언어는 그 말의 본질을 훼손할 뿐 아니라 그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 말로 인해 입술의 복록을 누리게 된다면, 언론매체들의 무차별적인 교회와 하나님을 향한 거친 언어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열매를 찾으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입술의 권세를 기억 목회자들 중에도 언어로 인한 목회적인 실수와 실패를 많이 보게 된다. 각종 회의를 하거나 시험든 성도의 거친 언행을 상대하다 보니 마귀가 틈을 노리고 찾아든 것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절제되지 못한 감정선이 언어를 통해 폭발하도록 마귀가 역사한 것이다. 교회의 모임인 제직회의나 당회를 할 때에 자기 생각에 반하면 이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 모든 결과는 고스란히 목회자가 책임져야 하고, 책임지더라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종의 말의 그 천박함(?)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입술이 복음증거의 나팔이 된다고 할 때, 복된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영적 긴장감 말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나의 말 한마디로 인해 시험 들게 하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언어생활 가운데 믿는 자의 향기가 드러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품격을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해야 한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기에, 말씀을 듣고 다시 자신의 입술의 말에 복음을 담아 전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이기에 그러하다. 말많은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입술에 성령의 재갈을 물림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범죄치 아니하고, 어려운 세상을 오히려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입술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