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육두품과 신수성가 신학교 다닐 때 부모와 인척가운데 목사가 열이면 성골, 장로가 열이면 진골, 이도 저도 아닌 일반신자의 가정이면 육두품아닌가? 라는 말이 ‘진담반 농담반’의 우스갯소리처럼 회자된 적이 있다. 부모세대가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루어 좋은 영적배경을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마땅히 부러워할 일이다. 믿음의 선대들의 기도와 헌신의 열매와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교회를 섬길 목회자라고 할 때, 출신만으로 좋은 환경의 피택을 결정짓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성경은 결코 부모세대의 충성과 헌신에 대해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운명론적인 사고에 고착되어 역동적인 신앙의 세계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주어진 배경과 개인 신앙의 열정을 함께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보면, 후자에 더 큰 방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형들의 미움과 배신으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를 설명하는 한마디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한다. 형제들에게는 버림받은 요셉이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의 삶이 ‘신수성가(神手成家)’의 축복을 받은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수저계급론과 갑을관계 골품제의 비슷하게 신분을 규정하는 말들이 한국사회 뿐 아니라 이곳 미주에서 조차 유행하는 말이 있다. ‘수저계급론’으로 통칭되는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이다. 두 가지 수저의 분류 기준은 부모가 자식을 뒷받침해주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고, 그 능력치가 높으면 금수저, 낮으면 흙수저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가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골품제처럼 자식들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라기보다는 자식을 통해 그들의 부모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흙수저로는 음식을 먹기 어렵고 물려줄 수도 없다. 부모 도움 없이는 자립하기 어려운 데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라는 자괴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용어가 또한 ‘갑을관계’이다. 현 사회의 새로운 주종관계로 규정되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말인데, 대한항공 회항사건을 통해서 많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태도와 자세를 덧붙이는 ‘질’이라는 용어를 통해, ‘갑질’이라는 말로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해 혐오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들이 되었다.
공생의 지혜 흙수저와 금수저, 갑과 을의 관계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유무형의 구별이나 현상적인 차별 없는 사회를 이룰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형식적인 존재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 대한 지혜는 무엇인가? 갑을 관계의 경우는, 갑은 을에 대해 관용하고 도와주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가지고, 을은 이를 감사하며 자신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잘 극복하여서 갑을의 관계가 공생과 협력의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수저계급론’도 마찬가지이다. 출생적 배경은 스스로의 의지의 결과가 아님에도, 태생적인 금수저의 위치를 확보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허락된 조건에 대해 감사하면서 연약한 흙수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받아 누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위치가 아닌 주는 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공생의 지혜라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흙수저이든 금수저이든 갑이든 을이든그 관계가 고착화된 형태로는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명론과 하나님의 주권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철학자는 결국엔 두 부류가 된다고 말하였다. 운명론자 아니면 허무주의자라는 것이다. 니체는 운명론자였는데, 태양이 서산에 지는 것처럼 운명에 맡기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를 기투(Entwurf)와 피투(Geworfenheit)된 존재로서, 자기 스스로의 결정권에 의해 출생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즉, 기투된 존재로서 세상가운데 이미 던져졌으니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운명론적인 실존을 드러내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서산에 필연적으로 지는 태양이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던져졌으니 산다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운명이나 허무함에서 실존을 말하지 아니하고, 섭리(Providence)를 받아들이되, 기계적으로 멈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신적 이끌림을 받음으로 삶에 매몰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을 말한다.
현재상황의 긍정 바울은 각기 처한 삶의 형편들이 다양하다고 할 때,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을 말한다. 다양한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처한 그 특정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최선의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그럴만한 위치가 되면 믿음의 일을 감당하려는 경향을 본다. 부교역자 시절에는 담임목사가 되면 이렇게, 장로가 되면, 세상에서도 원하는 성공을 하고나면 뭔가를 할 것처럼 하나님에게 조건을 거는 경우들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 조건부 신앙은 열매가 아름답지 못함을 본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다음 형편을 보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이 쓰시는 존재로 빚어져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울과 요셉의 수용 바울은 자신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 세 번을 간절히 기도했다(고후12). 그 때가 바울의 사역의 절정기였는데 건강의 문제가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병의 고침을 약속받는 대신에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12:9)는 응답을 받는다. 한마디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아프면 아픈 채로,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는 대로, 힘이 없으면 힘이 없는 대로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야 됨을 말한다. 자기형편과 처지 안에서 불평 원망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잘 감당하라는 것이다. 훌륭하고 성공적인 삶의 열매를 거둔 바로 그때만 내 인생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연약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지금 이 순간도 나의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요셉에게 있어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의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한 수용의 자세이다. 그는 고향에서 자신의 과거의 삶에 누렸던 자색옷과 자랑거리를 말하지 않았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했다. 열심히 보디발의 집의 마당을 쓸고 닦았을 것이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억울한 강간미수범의 잡범들이 모이는 감옥으로 보내지 않고, 고위관료들이 갇히는 지하 정치범 수용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 과정이 온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애굽에 팔려오자마자 총리가 되었다한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애굽말도 못하고, 애굽 문화도 모르고 일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억울한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그 과정을 수용하고 지하 감옥에 들어감으로 그곳에서 고급 정치 관료와 교제하고 그들의 꿈을 해석하면서 고급 애굽어와 문화도 함께 배우면서 하나님의 때에 부름 받았던 것이다.
믿음과 변화의 소망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삶의 다양한 상황들을 수용하고 긍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수용성에만 머물게 되면 계급구조처럼 고착화되어 믿음의 역동성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 안에서 모든 삶의 현재적 상황을 긍정하고 수용하며 변화의 열매를 향해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역동성을 소망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현재의 고착된 상황을 넘어서는 힘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의 삶은 바라는 것, 소망할 것이 있는 삶이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는 말씀을 믿고 기도한다. 소망의 사람은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받아 누리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과 가정과 자녀와 교회와 생업의 일들과 조국과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고착화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긍정하고 수용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변화의 열매를 향한 소망을 기대하며 무릎을 꿇는 것이다. 기도의 무릎은 우리의 삶을 기쁨과 생기와 은혜로 충만하게 한다. 염려는 마음을 조각조각 나뉘게 하지만, 소망은 염려 많은 제한된 현실을 변화의 열매로 채워가도록 우리를 견인한다. 결국,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수용, 긍정, 소망 삶의 복잡한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고, 변화의 열매를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수저계급론과 신앙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어색한 골품제, 갑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문제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단편을 생각해보았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수용해야 한다. 긍정해야 한다. 공생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한다. 역동성을 가지고 소망을 품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며 변화의 열매를 보기까지 달음박질하는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비록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선천적인 부재의 조건이 있다 하여도, 마침내, 요셉처럼 바울처럼 고통스런 차별된 삶의 환경을 지나 회복된 주의 백성의 영광을 맛보고 누리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