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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앞에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바른 은혜, 깊은 은혜는 배움과 순종을 요구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배움의 두 가지 길 수영을 배우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군대식으로 일단 물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면 살기위해서라도 물을 덜 먹기 위해서라도 본능적인 개헤엄을 치면서도 배우더라는 것이다. 주로 시골출신들이 이런 영법에 특별하다. 얼마나 물을 튀기고 요란한지 옆에 사람들이 가지를 못한다. 그렇게 멋있어 보이거나 즐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존의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미리 책을 보고, 교습을 받아서 곧장 물에 들어가고 싶지만 준비운동부터 제대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물을 즐길 수 있고 실력은 날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은혜로 된다는 것이 세상운동과는 확연히 다르겠지만, 가르침을 따라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고 순복함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처음부터 요란하지는 않아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신앙의 재미에 깊이 빠져듬을 본다. 반면에 처음부터 불같은 은혜를 경험하면서 시작한 분들은 열정과 함께 기복도 함께 심한 것을 본다.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같이 시작되지만 배움과 순종을 통해서 더 풍성하고 더 부요한 열매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한화-김성근 감독 한국 프로야구 팀 중에서 한화 이글스라는 만년 꼴찌하는 팀이 있다. 그래서 한화라는 팀명을 ‘화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를 보고 있자면 화가 난다는 말이다. 이런 팀을 은퇴할 나이가 넘어 감독을 맡은 분이 있는데, 김성근 씨라는 분이다. 그의 감독부임 후 한화는 팬들을 ‘화나’게 하는 팀이 아니라 ‘마리화나’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중독성 있는 경기를 하게 되었다. 최근 이 팀에 대해 선수혹사논란이 일게 되었다. 예전과 다른 선수운용방식으로 부상선수가 속출한다고 그를 분별력 없는 감독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명쾌한 논리로 문제를 설명했다. 그의 말인 즉, 운동선수에게 있어 기본기가 되고 그 위에 실전기술을 익히고 성장해야 단단해지는데 기본기가 잘못된 상태에서는 하면 할수록 부상과 경기의 패배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특정 선수의 기본기를 수정하고 훈련했을 때의 발전적인 성장내용을 증명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바른 은혜-깊은 은혜 신앙에도 기본이 중요하다. 가장 큰 기본은 구원의 감격과 은총이다. 예수님을 만난 감격이다. 이러한 기본기위에 신앙의 복된 집을 짓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순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배워서 남주지 않는다. 배우면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말을 학교공부만이 아닌 신앙생활에서도 적용하는 것이다.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어느 한순간 기적 같은 은혜가 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순간 한방에 훅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무조건 은혜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서 깊어지는 바른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은혜, 깊은 은혜는 반드시 배움과 순종의 과정을 요구한다.

감정우선 세상과 은혜 누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이 30%, 감정의 영향이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사람은 아는 데로 배운 대로 살아가기보다, 감정과 기분대로 살아가는 존재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즉,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서 마음이 내키지를 않아서, 기분 나빠서 안하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사람 같은 경우에는 기분 나쁘고 욱하면 천국도 안가겠다고 배짱부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복된 신앙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분이나 감정의 요인보다는 말씀에 대한 앎과 신앙의 고백 그리고 결단을 통해서 배우면서 순종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고 싶어서 가는 길이 아니라, 가야하니까 가는 것이고, 옳으니까 자기를 항복하면서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자기항복이며 자기포기와 자기부인’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자기를 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로 결심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도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말씀의 빈익빈 부익부 인생의 이런 감정 우선적인 본성 때문에라도, 말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배움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현장은 말씀 배움에 있어서의 빈익빈 부익부가 심각함을 보게 된다. 말씀의 복을 누릴 기회를 스스로 걷어내고 있는 것이다. 말씀과 순종이 온전히 믿음의 길을 안내하고, 신앙성숙의 단 열매를 맛보게 되는 것인데,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귀 막고 살려는 사람들이 많음을 본다. 특별히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에 대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음성으로 듣지 못할 때, 이를 인터넷과 같은 다른 통로를 통해 공급받게 될 때, 귀는 복을 받아 높아질지 몰라도, 그 영혼이 복 받는 자리에 이르기에는 요원한 일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인터넷 중고물품 판매사이트에서 모유를 사고파는 일명 ‘동냥젖’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었다.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하며 면역력을 높이고 소화 흡수에 좋은 모유를 인터넷사이트에서 구입해 아이에게 먹이는 일들이 엄마들에게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중고사이트에 올라온 모유 가운데에는 바이러스 감염 등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면역력이 취약한 신생아들에게는 한층 더 위험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세계에도 동냥젖 논란이 일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와 기독교 텔레비전 등을 기웃거리고 거기서 마구잡이로 설교를 선택하거나 다운 받아 듣는 설교동냥 행위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냥한 설교를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교회내의 교인들, 특히 초신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전파하는 동냥설교 돌리기마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동냥젖으로 자란 교회들은 그 믿음이 뒷심이 하릴없이 무너짐은 예견된 일이 아닐까?

간절한 배움과 순종 말씀은 그 공동체의 예배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의 충만함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더불어 순종하기위해 듣는 말씀이어야 함에도, 온전한 예배 없이 필요한 지식의 섭취로서의 말씀 들음은 위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비바람불면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한 말씀은 형편은 위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귀로만 듣는 사람들은 증명과 변증을 요구한다. 자신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주면 믿어줄게’라는 입장이다. 신에 대한 영역을 자기 머리 밑으로 제한하려는 것인데, 결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 신앙생활도 예수 자체를 알도록 애쓰기 보다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는 늘 예수 믿는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을 자신의 신앙의 깊은 진보를 제한하는 핑계 거리로 삼는 것을 본다. 결국, 간절한 배움과 순종이 생략된 신앙의 여정은 그 열매가 마치 나뭇잎만 무성한 돌배나무 같아서, 열매의 단맛을 보지 못하는 지루한 신앙여정이 기다릴 뿐이다.

인생의 연약함과 은혜의 당당함 최근 장로 기업가와 시장출신의 믿음 좋다고 소문난 이들의 자살기사가 났다. 유서를 넉장이나 쓰는 동안에 과연 그가 평생을 믿고 의뢰한 주님은 그 연약한 마음을 붙들 수 없었단 말인가? 하나님을 원망함이 아니다. 인생의 한 없이 연약함에 마음이 아픈 것이다. 문제없는 인생이 없을 터인데 세상에 직면한 그 문제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는 없었을까를 생각한다. 문제를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친밀함을 경험하고 영광을 드러내는 간증의 주인공도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너무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될 때 흔히 그렇게 말한다. 누가 와도, 누구라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이 말은 불신앙적인 용어임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너무 구조적으로 고질적인 문제는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는 자리에 이르게 한다.

교회 와서 기도를 하고자 해도 기도할 내용이 너무 심각하고 크면 기도말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라도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는 그 자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버티기만 하여도 은혜의 빛을 보지 않았겠는가? 생각된다. 세상문제 앞에 두손 두발 다 들었듯이, 은혜의 자리 앞에서 무장해제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당당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을까를 생각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의 힘을 증명하는 당당함이 아니겠는가?

은혜와 세상 앞에 당당함 어떤 분은 세상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서 세상재미에 빠졌던 때를 눈물로 회개하고 은혜를 회복하고 나니, 화려한 바깥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누추하고 불편한 감옥생활에도 전혀 춥지도 불편하지도 어둡지도 않더라는 고백을 한다. 은혜를 회복하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환경 안에서 우리를 당당하게 하는 은혜의 힘인 것이다. 위기와 고난이 닥치면 스스로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그로기(groggy)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일상에서 잘 훈련된 복싱선수는 그런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펀치를 내지를 수 있다. 인생은 연약하다. 그러나 일상의 자기를 포기하고 항복하며 전적신뢰의 삶을 결단할 수 있으면, 그 인생은 그런 순간에 도 오히려 은혜의 찬란한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문제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 당장 인생이 끝날 것 같지만, 죽고 사는 것 흥망성쇠는 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린 것임을 믿어야 한다. 문제가 있다고, 죽을 것인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 문제 있을 때마다 헤어지고 나뉘어질 것인가? 목회가운데도 문제는 항상 등장한다. 그때마다 목회안할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사업의 문제 있을 때 마다, 접고 창업만 할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파라과이의 개미들에게는 파인애플 떨어지는 소리가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된다. 믿음의 분량이 문제 앞에 호들갑 떨지 않게 한다. 하나님을 아는 은혜만큼, 그의 말씀 앞에 배움과 훈련으로 체화된 믿음만큼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그의 손에 붙들린 삶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눈/관점의 늪에 빠져드는 일을 피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신(神)지식(Knowing God)은 문제 속에서 자신을 떼어내어 하나님의 눈으로 문제를 다루게 한다. 그것을 ‘섭리적 해석’ 혹은 쉽게 하나님의 손/눈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아름답고 향기나게 주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빚어가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손/눈)의 역사이다. 말씀을 아는 자에게 이 비밀을 보여주신다. 말씀에 대한 배움과 익힘과 순종이 곧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능력의 무기를 얻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알고 거기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 인생은 놀라운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이 복된 기회를 거부하지 말자. 문제에 매이지 않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손/눈으로 삶을 이끌어갈 것이다. 기분 따라-감정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 따라 은혜를 훈련함으로 축복의 열매를 맛보는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잎과 열매가 무성하지만 쓸모없어 버림받는 돌배나무 같은 인생이 아니라 단 열매를 토해내어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참 배나무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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