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고백을 요구하는 시대
악한 마지막 종말의 시대를 지나면서, 세상은 점점 더 믿는 자들에게 신앙의 분명한 고백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도대체 당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믿음의 공동체가 예배가운데 사도신경을 공동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에서도 마음에 간절함이 느껴진다. 주일 아침마다, 나의 믿는 바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함께 고백하며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지를 한 목소리로 제창하는 것은 이 악한 세대가운데 너무나 귀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럴 줄 몰랐다?’
지난 6월 미국장로교 제222차 총회가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열렸다. 놀라운 것은 오전 11시에 성찬식을 겸한 개회예배를 드린 후에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전체 회의의 시작 때, 근래 올랜도에서 발생한 총격사건과 무슬림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화해와 용서와 평화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초청된 포틀랜드 지역의 무슬림 종교지도자가 단상에 올라가 인사를 하기로 순서에 정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무슬림 지도자가 알라의 이름으로 그 단상에서 기도를 하고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미국장로교에 소속된 한인 목회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사과와 유감을 표명했다는 소식도 뒤에 듣게 되었다. 그 사과의 해명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갑자기 예정에 없던 기도가 진행됨에 대해 자신들이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말을 새롭게 되새겨 본다. 과연 이럴 줄 몰랐을까? 그렇다. 인생은 유한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기에, 실수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전적인 용서와 관용의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용서와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우리는 더한 일을 한다 해도 눈감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인생의 죄악들과 죄의 전염성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 일을 성경을 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예견된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럴 줄 몰랐다’라는 말에 대해 핑계와 무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죄의 전염성에 대해 성경은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만일 네 손이(네 눈이,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고 빼 버림으로... 영원한 죄의 심판을 면할 것을 말한다’(막9:43-47).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해서 모인 자리에 왜 무슬림 지도자가 단상에 올라가야 하는가? 하나를 주고 둘을 주면 셋을 내어주어야 함을 왜 알지 못하는가? 그렇게 하면 정말 저 무슬림과 기독교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예견했단 말인가? 이 일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에 벌써, 뉴욕의 어느 미국교회가 교회 강대상에 스님과 불교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이용하면서 설법을 행하던 아찔한 장면을 보며 탄식했던 기억이 났음은 전혀 낯선 장면의 연결이 아닐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이 주신 나라와 백성과 왕권을 더욱 강화하여 큰 나라를 이루고자, 그가 생각하는 태평성대를 달성코자 한 사람 두 사람 정략결혼으로 궁전에 불러들여 평화조약을 맺을 때, 당대에는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씩 둘씩 내어준 결과가 무엇인가? 후에는 하나님이 세운 왕의 궁전에서 우상숭배가 범접하듯이 이루어지는 그 비극을 성경이 보여주는 데, 왜 이것을 왜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상 아담 하와로부터, 아브라함 다윗 등에 나타난 인생의 많은 죄악들이 가진 죄의 전염성의 당연한 열매들이다. 이것을 알도록, 예견하도록 우리는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수롭지 못한 해프닝?
혹자는 말한다. 이것이 뭔 호들갑이냐? 다같이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자는 것인데... 라고 말한다. 또한 이 미국교단은 우리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교단인데,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변설하기도 한다. 지도자의 이 같은 언급에 얼굴이 붉어진다. 교류와 협력과 동역은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할 문제이겠으나, 성경과 교회사와 특별히 한국교회사에 남겨진 지도자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기독교 전체 진영에 해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938년 제 27차 조선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의식의 하나로 공식 결정한다. 이유라는 것이 해방 후 저들의 변명을 추억해보면,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나 찬성한 이들이나, 감옥 밖에서 교회를 지키며 고생한 이들과 감옥 안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고생한 그들이나, 모두가 교회를 위함이니 서로 관용하자는 것이다. 덮고 지나가자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말함에 무슨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앞선 지도자의 분별력
훗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해명하면 될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민족의 영적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앞으로 7년 후에 있을 해방에 대한 역사적 안목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영적인 의식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7년 후에 해방을 맞이했을 때, 저들은 더 이상의 변설은 내려두고 자신들이 영적으로 둔감하였음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돌이켰어야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감옥 안에서 순교한 것처럼, 자신들은 보이는 교회를 위해 감옥 밖에서 순교했다는 식으로 변설함으로 저들은 더 이상 영적지도자의 자격을 스스로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문제는 지도자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저들을 따르는 수많은 민초들에게 격심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의 분별없음이 얼마나 해악인지를 우리는 열왕기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그러한 역사적 안목을 상실한 지도자들의 불회개가 5년 뒤에 한국전쟁의 잔혹하고 피폐한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왜 이것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보는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는 바가 없는데, 그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그 평양도성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김일성 가문의 우상들이 초대형 사이즈로 세워져있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던 그 도시가 이제는 가장 칠흙같은 암흑의 도성이 되지 않았는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평양에서는 주일이면 가게 상점들이 문을 닫고 찬송 부르며 예배하러 가던 바로 그곳에 지금은 어떤 노래 소리가 들리고 있는가? 그럼에도 전쟁의 상처위에 반도의 한쪽을 남겨두시고 세계의 가장 복음의 역동성이 넘치는 한국교회를 허락하심은 남은 자를 붙드시고 소망을 불어넣어주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긍휼과 은혜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과 1938년
2016년 지금 이 시대에, 1938년 그때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렇게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참으로 귀한 복음을 우리 조선에 전해준 현 미국장로교회의 행태가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저들은 과연 무슬림 지도자를 단위에 세움으로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진실로 기대했단 말인가? 더 나아가 가장 핫이슈가 되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발자국 두발자국 계속해서 안방을 내어주고 성경적인 신앙고백과 멀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관용과 이해를 말할 것이란 말인가?
필자에게 신사참배 결의와 최근의 이 일에 동시적인 연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일반성도들의 경우는 더 할 것이라 여겨진다. ‘무슨 문제가 되느냐? 다같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자는 것인데,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라고 관용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공동총회장으로 선출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의 여성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도리에도 달리 견해를 가진다는 소식을 언론매체를 통해 듣게 된다.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느껴짐은 필자에게만 유독 특별한 것인가?
하나님의 원하심은 구별된 거룩함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의 거룩함을 닮은 거룩이다.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본질의 구별 없이 거룩을 이루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 지나치게 말해서, 사람밥에 개밥을 섞으면 그것은 개밥이지, 사람하고 나란히 먹을 수 있는 사람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를 혼용하면, 하나님의 거룩의 진리가 상실되는 것이지, 결코 진리를 보전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섞어보자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므로, 더 우월한 진리를 찾아서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복리를 누려보자는 것이지만 사실은 진리를 거스르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진리의 구별된 거룩성을 위배하면서까지 이룰 평화와 화해는 불가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를 급격히 수용하는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를 급격히 수용하는 시대를 앞으로 우리는 더 격하게 살아갈 것이다. 특별히 1세들의 시대는 옳음과 그름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왔다면, 이제 우리 2세 아이들은 전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속에서 진리를 분별하고 수용해야 하는 복잡한 시대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기계문명의 편리는 더욱 그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특별히 아이들의 교과서에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관계,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더 나아가 사람과 짐승의 성적관계의 여러 경로에 대해서까지 기술하는 교과서를 받아보는 시대가 된다면, 이를 다양성속에서 포용을 요구받는다면, 정말 참된 교회를 이루며 진리를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너무나 절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특별히 이미 기독교 내부에서부터 다원주의적인 사상에 의해 진리를 이해하려는 생각들이 편만해져가는 것을 볼 때 깨어 경성해야 할 때임을 의식하게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로마서 12장2절의 말씀처럼 다른 어떤 것보다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함으로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자신의 몸을 산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림으로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된 자녀의 삶을 살아가기를 극명하게 요구받게 될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 생각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의 분명한 고백과 삶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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