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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주의에 물든 세속화된 신앙

편하고 편리한 것만이 진보와 발전은 아니다

교회와 신앙에 대해 연구하는 기관들의 기독교 세속화에 대한 공통의 염려를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와 배금주의를 꼽는다. 여기에 필자는 신앙의 편리주의가 엄청난 사단의 공격루트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어쩌면, 신앙의 편리주의는 가장 드러나지 않게, 마치 조지 바나(J. Barna)가 말하는 “주전자 속의 개구리(The Frog in a kettle)”처럼, 아무런 영적 감각과 의식 없이 살아가는 삶속에서 한순간 세속화에 잘 반죽된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편리함이 발전인가?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한다. 예전의 크고 무거운 컴퓨터를 들고서, 부팅을 하고 한참을 기다리면서 사용하던 컴퓨터가 이제는 한 손바닥 안에 들어와서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클릭하는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을 사용하는 필자도 가끔은 이토록 편리한 전화기가 나를 삼켜버리는 조지 바나의 개구리를 삼키는 주전자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심방, 광고, 공문, 심지어 노회의 회의까지도 예전의 스카이퍼 세대를 넘어서서 카톡방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게 되니, 피할 수는 없지만 가끔은 베이직 폰으로 돌아갈까 생각해보면서도 이 편리한 문명의 도루를 포기하지 못함을 본다.

과연 편리해지는 것만이 진보와 발전인가?를 생각해본다. 인간으로서 삶의 편리함을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것이 영적인 부분까지 침투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편리주의라면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삶의 편리주의가 침투하는 세속화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의 온전함을 지킬 때에 삶의 유익함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편리주의 현상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면, 이미 일주일에 한번만 교회가면 되지 않느냐, 꼭 교회에 가야만 예배가 되느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 않는가? 라는 편리주의가 일반화되어 가는 것을 본다. 그 한 가지 예로, 1부예배가 드려지게 된 것은 교사 등 봉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예배를 빨리 드리고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예가 많음을 본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드려지는 것인데..., 사랑은 시간 떼우기가 아닌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가운데 은혜가 있는데..., 주일은 주님을 온전히 예배하도록 정하신 날과 시간인데...등등’ 다른 약속과 목적을 취하는 데 있어서 편리를 도모하도록 이용되는 예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본을 빼놓고 드리는 예배에 은혜가 없으니까, 반대로 은혜 받지 못하는 자신을 타당화 시키기 위해 교회의 다른 문제를 핑계하거나, 과거에 나도 은혜를 입을 때가 있었다며 추억의 신앙으로 전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몸을 드리지 않는 신앙

몸이 교회로 오지 않는 편리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한다. 몸을 산 제물로 주님 앞에 가져오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말세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데, 몸을 움직여 모이지를 않고 귀신도 아닌데 몸 없는 예배, 그런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다. 꼭 내가 몸을 움직여 교회에 갈 필요가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말씀 듣고, 필요하면 헌금은 체크로 보내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중에는 교회에서 섬기는 봉사의 일들도, 로봇이나 돈으로 고용된 일꾼에 의해 감당케 할지 모를 일이다.

편리주의는 세속화로 귀결

아마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예배하는 처소도 필요없다는 예배당무용론에 도달할 것이다. 극단의 예일지 모르지만, 너무나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예배당에서 유행가 가수의 쇼가 펼쳐지든지, 술과 재떨이를 두고 예배하는 교회도 생기지 않겠는가? 아니면, 아예 술집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야 할 것 같은데, 들려지는 말로는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는 이미 초신자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교회당 한쪽에 재떨이를 두었다고 하니, 구별됨의 장소로서의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지마라, 예배드리러 가지마라, 편하게 편리하게 신앙생활 하라는 것은 결코 성령의 음성이 아니다.

마귀의 지혜-멀리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다시 저들을 회복시키고자, 모세를 보내어 바로왕을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 섬기고 살겠다. 예배드리러 가겠다. 저들을 보내달라고 하자 바로의 첫 대답은, ‘거기까지 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 너무 멀리가지 마라(출8:28). 광야에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예배를 드려라.’고 말한다. 바로왕의 대답은 마귀의 지혜이다. 거기 광야로 가지 말고 그냥 있는 자리에서 밍기적 밍기적 거리면서, 여기 침대위에서 속옷차림으로 인터넷 켜두고 내 마음의 사정에 따라 은혜 되는 목사님을 선택해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바로 여기서 설교 듣고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전화기에서 온갖 말씀 다 나오는데, 불편하게 개스비 들여서 구태여 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꼭 그렇게 멀리까지 네가 섬기는 교회 갈 필요가 있나? 마귀의 소리이다.

신앙을 강요하지 마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세에게 바로는 다시 타협안을 제시한다.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드려라, 그런데 가족 모두 가지는 말고 남정네들만(출10:11) 가라는 것이다. 남자만 가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집안의 대표자만 가면 되지 않으냐, 신앙은 개인적인 것인데, 너만 잘 믿으면 돼지 왜 믿음을 가족들에게까지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꼭 가족이 같은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때가 되면 다 믿겠지, 너무 어렵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단의 교묘한 타협의 소리이다. 내가 가진 그리스도의 신앙이 영원한 생명의 유일한 길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강요이상의 강요를 넘어서는 강권함으로 저들과 함께 주님나라가기위해 몸부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물 없이 예배드리라

거듭된 재앙의 고통가운데, 마지막으로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고 말한다. 예배에 드릴 제물은 두고 빈손으로 가라는 것이다. 교회에 은혜가 떨어지면 재정문제가 시험거리가 되듯이, 남자가 신앙 떨어지면 돈부터 말해서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가게 한다. 예배를 온전히 못 드리게 하는 것이다. 은혜는 받았는데, 드릴 것이 없으면 마음이 냉랭하게 차가와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공수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물이 없으면 제사가 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사단은 십일조의 말씀을 교회에서 돈 이야기 하지마라고, 왜 부담주느냐고 반박하는 지혜를 가지고 신자를 유혹한다.

바로왕의 소리는 사단마귀의 소리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유월절 재앙을 통해서도 반드시 그 백성들을 자신이 원하시는 구별된 자리로 이끌어 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많이 불편해도 부담이 되어도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말씀 그대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신앙해야 한다.

신앙은 편한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 예배는 편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작부터 마치기까지,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십자가를 붙잡고 회개하며 마음이 축축해서 드려지는 시간이다. 예배는 편하게 하는 게 아니다. 죄성을 거스르며 성령과 말씀이 내 영혼을 조명하며 철저히 말씀에 초점 맞추어 겔36:22-25의 말씀처럼, 영혼의 불순물이 씻겨나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영혼이 수술받는 구별된 시간이다. 불편할지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배의 구별이 온전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히 구별된 복장도 필요하다. 댄스홀에 왔는지 예배당에 왔는지 구별되지 않거나,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인지 어떤 지 모를 자세로는 도저히 구별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소비자중심주의를 거부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다. 교회의 존재목적의 가장 첫 번째가 예배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예배를 잘 못드리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좋은 교회는 예배 잘 드리는 교회이고 좋은 그리스도인은 예배 잘 드리는 성도이다.

소비자 중심주의 태도를 없애야 한다. 마치 물건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듯이, 자기만족 기쁨 편안함이 목적인 소비자 중심의 소비주의가 되면 안된다.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에게 영광을 올려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하늘 문을 열고 주시는 은혜가 우리가 누릴 만족과 기쁨이다.

앞으로 미래는 예배의 장소뿐 아니라, 시간도 마음대로 정하는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 중심이 아닌, 예배드리는 소비자형태의 성도중심으로 편리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도 이에 발맞추어 모든 상황들이 주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로 변경시켜 갈 것이다. 그 뿐인가? 예전에는 교회 가는 일 때문에 교회봉사 하는 일 때문에 부부싸움하고, 자식과의 싸움이 되었는데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선을 위해지나가는 아픔의 시간이 필요했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이러한 고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기다리고 기도할 틈도 없이 너무나 잘 알아서 해결하고 타협하더라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적당히 타협하고 이해하니, 하나님이 개입하실 틈도 없고 더불어 신앙의 아름다운 간증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것

오늘날 인터넷을 보면, 십일조나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목사님을 향해 율법적이라고 공격하는 일들이 많음을 본다. 예배하는 날로 정하신 주일도 마음대로 바꾸고, 교회예배당 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선각자처럼 대우받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저것 편리하게 다 바꾸게 되면, 나중에는 편안하게 팬티바람으로 집에 앉아서 다 할 것이다. 망하는 세대, 타락하는 세대의 모습이다.

이 악한 세대는 참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려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편하게 믿어라. 뭘 그렇게 별나게 신앙생활 하느냐고 말한다. 적당히 섞여 살아라’라고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씀대로 지키자고 하면, 율법적이라고 말한다. 그 내면 속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과 멀어지게 하는 바로의 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편리주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여 악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편리하고 편한 것만이 발전과 성숙은 아닌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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