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대전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회복 컨퍼런스가 한국의 대전 침신대에서 있었다. 당시 메르스의 영향으로 전국이 어수선하던 때라서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모였다. 대부분의 예정되었던 수련회들이 많이 취소되던 때라, 강행하는 데에 따른 부담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메르스가 영향을 끼쳤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컨퍼런스 시작 즈음에, 국무총리의 메르스 종식선언이 나올 만큼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영혼의 빈곤과 피폐함 한국의 그러한 전국적인 분위기 탓인지, 대전이라는 지역에 제한된 일일 수도 있지만,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이 삶의 상황가운데서 여유로움보다는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긍정적이지 못한 긴장감은 또 다른 영적인 문제를 도출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시내 전도를 하기위해 대전 시내를 나갔는데, 지하상가의 수많은 곳에서 ‘타로’라는 좌우에 늘어선 점집이 있는데, 그곳에 젊은 애들이 줄을 서듯 붐비더라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보면, 최신 문명기계에 정신이 몰두된 애들이, 동시에 점을 친다는 것이....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 어떤 최신 문명기기를 손에 쥐었다 하더라도, 영혼이 주님 앞에 서지 못하면 그렇게.. 그렇게.. 카드 종이 한 장에 자신의 운명을 듣고 싶어 하는 약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범죄-Lone Wolf 미네소타 대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접근성(broadband availability)이 좋아질수록 사회적 편견과 혐오로 인한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FBI가 제공한 8년간의 인종 차별 범죄 데이터와 미국 통계청의 데이터를 분석 결과를 토대로, 미국 내 특정 자치(county)의 인터넷 접근성이 좋아질수록 해당 지역 내 혐오 범죄 횟수가 증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중요한 이유가 특정되지 않은 ‘고립주의자(lone wolf)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기만의 생각에 집착하고 있으면서, 공공에 드러나지 않던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자기의 혐오 인식에 부합하는 사례들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면서 편견을 강화했고 그것이 특정범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기계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더욱 더 인간답게 변화 성숙으로 나아가는 결과가 아닌, 당초의 이상과 거리가 먼 개인 인격과 영혼의 파괴, 더 나아가 공동체의 유익을 파괴하는 쪽으로 진행하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끊임없는 학습 인터넷 중독의 실제적인 문제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 한국에서 전쟁게임에 중독된 학생이 게임을 하던 중 집밖으로 나와 칼로 사람을 해친 후에, 경찰이 집에서 체포하고 보니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 태연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누가 지배할 것인가? 단순히 배우고 익히고 듣는 후천적 학습을 넘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에서 끊임없이 우리가 학습되어지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특별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그 학습속도가 더 빠름에 비해 부모세대들은 허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민생활의 많은 고생을 뒤로하고 인내했는데,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가상세계에 빠져버린 자녀들을 보면서 마치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허무한 심정임을 토로하게 된다.
기갈의 날과 소금물 이러한 흐름의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박종호 찬양가수의 간증가운데 한 토막이 기억난다. 그는 훌륭한 음악성으로 인정받던 때에 아르바이트(?)로 서울의 대형교회에 특송과 찬양 전문으로 불려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배를 드림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하기위해 간 것이었기에 찬양은 드려도 하나님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에 불과한 것이었고, 결국 예배는 안되고 일은 했으니, 교회로부터 받은 사례금으로 술을 사먹으면서 영혼의 지독한 갈증을 달랬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다. 현대인의 특징은 “목이 마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목이 탄다”는 사실이다. 옛날보다 훨씬 풍요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런데도 늘 목말라 하며 각양각색 크고 작은 갈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장 심각한 갈증은 돈과 이성과 권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혼의 갈증이 뿌리이다. 세상 속에 파묻히면 파묻힐수록, 정반대로 피하면 피할수록 영적 갈증은 더 심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전3:11). 그래서 참된 신자에게는 영적인 기갈을 세상의 것으로 대체하려고 할 때, 마치 가뭄에 소금물을 마시듯, 그 갈증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적전투의 본질적인 회복은 무엇인가?
전후방 없는 영적전투 오늘날 실제 전투의 모형은 전후방이 없다는 것이다. 영적인 전투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특별히,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기계문명을 통해서 교묘히 침입해 들어오는 영적인 어둠의 세력과의 죄악의 문제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불어 직분과 신앙의 연륜도 구별이 없이 처량하게 무너져서 목회자의 범죄 현상도 눈에 띄게 나타난다. 다름 아닌, 엡4:18-19절의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에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설명하는 영적싸움의 실패 현상이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몰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살도록 미혹하는 존재가 있는데, 어둠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주를 아는 순간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감각해지고, 원수 되었던 어둠의 세력과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마침내 기갈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빈약한 영혼 이 어둠의 세력은 사람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디를 공격하고,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떤 때는 사자처럼 핍박과 고난으로, 어떤 때는 유혹과 쾌락으로, 어떤 때는 안일함과 게으름으로, 어떤 때는 교만과 시기케 함으로... 신자의 삶을 속이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영혼의 갈증이 해소가 되지 않으면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혼은 너무나 빈곤하기 그지없어서, 작은 카드 종이하나에 나의 운명을 맡기려는 나약함으로 떨어져버린다. 아니면, 아무런 절제와 변별력도 없이 재미를 목적으로 하는 문명의 작은 도구 나의 마음과 시선을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영적전투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식하고 다루어야 한다 악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받지 않을 때 사람들은 대개 이를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점점 구체적으로 나의 삶을 비집고 들어온 뒤에야 깨닫게 되는데 이미 늦었을 때가 많다. 무엇보다 분명히 존재하는 힘인 죄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의식해야 한다. 거짓을 진리처럼 믿게 만들고 거짓에 대한 개념자체를 잊어버린 채, 거짓의 아비 사단의 조종가운데 살도록 만드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거짓의 실체는 사단이다. C S 루이스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나쁜 길이 아니라, 아주 부드럽고 좋은 내리막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길인 들 뭐하겠는가? 목적지가 지옥 가는 길이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 한순간에 거짓이 찾아오고 거짓에 싸여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의식하면서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드릴라의 유혹에 잠든 동안 삼손의 머리카락은 잘려나가고, 영적인 힘들이 쭉 빠져나갔다. 그리고 눈이 뽑히고 몸이 묶인 상태에서 저들 이방신상과 저들을 섬기는 이방인들 앞에서 춤까지 추는 온갖 수모와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삶도 믿음의 여정이었다고 고백하지만, 그러한 인생의 결론은 나실인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의식하지 못하고 무감각함으로 사단의 놀잇감이 된 것이다.
떨어지면 마른 땔감 살아있는 나무 가지를 칼로 베어보면 진액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마른 나무는 아무런 진액도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땔감으로 적격일 따름이다. 비가 많이 온 후에도, 불을 피워보면 아무리 젖었다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활활 다 타버리고 만다. 그러나 살아있는 가지의 나무는 아무리 청명한 날씨에 불을 붙여도 잘 타지를 않음을 본다. 주님은 우리를 포도나무 되신 당신의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 오직 의식하며 주님께 붙어 있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루스의 빈들과 세겜의 유혹이 있는 세상길 세상과 그 배후의 영적존재와의 전투를 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머무는 것이 근본적인 삶의 회복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출발이 됨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 한다. 야곱이 형님과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의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챈 후, 생명을 위협을 느끼고 하란의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의 집을 향해 가다 피신 길에 루스 땅을 지나며 잠이 들었다.
‘루스’라는 지명의 뜻은 ‘길을 잘못 들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행자들이 길을 잃기 쉬운 지형인 곳이다. 이곳에 잠든 야곱의 모습은 길 잃어버리기 쉬운 인생길에,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돌베게 위에 머리를 고인 우리의 나그네 인생을 정형화한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기업의 언약을 재확인 시켜준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결단과 서원을 드리게 된다. 길 잃어버리기 쉬운 루스가 하나님의 집–벧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금 그의 삶은 하나님을 중심에 만난 자의 삶이라기보다는, 목적한 여인을 아내로 얻기 위해 몸부림치고, 거부가 된 이후에 돌아와서는 즉시 벧엘로 올라감이 아니라 눈앞에 보기 좋은 세겜 땅에 거하다가 가족멸절의 위기까지 보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 다시 루스의 빈들 같은 상황을 세겜에서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집-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회복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삶의 전부를 회복시키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이어가게 하셨다.
당신의 벧엘이 어디인가? 정한시간 정한장소의 예배 루스와 세겜같은 세상의 빈들에서 벧엘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의 루스와 세겜 그리고 벧엘이 어디인가? 루스가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변화되었지만,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그곳이 벧엘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 이제는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교회도 신학교도 목회자도 많은 이때에 세상은 더욱 더 갈증의 몸부림 속에서 목이 마른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상황이라고 부르짖음을 보게 된다. 어떻게 존귀한 영혼이 점쟁이 종이 카드 한 장에 자신의 운명을 예고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기계 앞에 인간이 중독지배를 받아,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 된단 말인가?
이러한 세상의 빈들에서 우리는 벧엘을 만나 그곳에서 자고, 은혜를 사모하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그곳에서 만나야 한다.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의 언약을 확인하고, 그분 앞에서 삶의 부족함을 내려놓고 결단하며 회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로 연약해진 갈증 난 인생을 만나주시고 회복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불어 마침내 서원이 있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날 루스와 세겜이라는 이민자의 길 잃어버리기 쉬운 인생살이에, 당신의 벧엘이 어디인지 묻는 다면 어디를 말해야 할 것인가? 본질적으로는 영원한 본향 천국도성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그 벧엘을 찾고 구한다면, 그곳은 바로 내가 섬기는 로컬처치, 나에게 있어서는 알칸사 리틀락의 제자들교회이다. 주의 몸 된 교회에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드려지는 예배가 인생의 회복의 길과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찾고 구하고 생각하여도 아무리 찾고 구하고 생각하여 보아도, 영혼의 갈증이 해소가 되지 않으면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혼은 빈곤하기 그지없어서, 작은 카드 종이하나에 청춘의 운명을 맡기려는 나약함과 아무런 절제 없이 문명의 작은 도구하나에 온갖 마음과 시선과 영혼을 다 빼앗겨 버리는 세대이다. 무엇으로 회복이 될 것인가? 거친 사막광야 같은 루스의 빈들에서, 세겜의 달콤한 유혹의 현장 속에서 나의 벧엘을 회복하고, 그 벧엘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게 될 때, 분명한 승리-삶을 드릴 서원이 있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