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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소유에서 나눔으로의 회복

-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증거 -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너무나 이기적인 세상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의 현상에 대해 언급하면서(딤후3:2), 가장 우선되는 현상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라는 말로서 극심한 이기적인 세대가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시대와 방불하며 예수를 알아도 전혀 믿음과 상관없는 것처럼 사는 시대가 말세에 도래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이라는 말세현상과 예수를 앎’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존귀한 예수로 변화된 세상 미국에서 살다가 선교지들을 방문해보면, 문화의 독특성을 인정하면서도 저들 가운데 아직은 상대방에 대해 배려와 관용의 모습이나 공중질서를 지키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운 일을 종종 만나게 된다. 더불어, 이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존귀함이 부어질 수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 무질서하고 자기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삶이 존귀하게 될 때, 복음이 주는 자유 속에서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 마침내 그 선교지도 사람 사는 세상–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지으신 이웃을 당연히 사랑하는 그런 복된 땅이 될 수 있음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세상의 상식으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의 급진적인 변화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표징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과연 그렇지 않은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세상정욕 속에서 삶의 질곡 같은 환경 속에서 복마전 같은 인생여정을 지날지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늘날 믿음으로 주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 하여도,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주님 말씀하시는 말세현상의 분명한 징조가운데 동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그의 마음에 과연 자비와 관용이 흐르고 있는가?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과 가정과 자녀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으로 똘똘 뭉친 굳게 닫힌 여리고성과 같을 때, 그는 명목적이며 교리적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참으로 풍성하고 부요한 그리스도인의 부요함들은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세의 이기적인 욕심에 갇힌 연약한 인생이 그 무한한 세상 정욕에서 해방되는 길은, 더 가지고 모으는 데 있지 아니하고 변화된 삶으로서의 진실된 나눔에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운데 온전히 회복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곧 나눔을 믿는 사람 오늘날 자녀교육의 왕도가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는 것이 되어짐을 본다.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유유상종이어서 철저히 이기적인 아이 옆에는 역시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앞가림이나 하는 아이들로 인의 장막이 형성될 것이다. 서로를 세워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한몫 챙기려는 목적중심의 아이들이 평생의 인맥이 된다는 것은 심히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의 기준에서는 모자라고 바보스러워 보일지라도 나누고 베푸는 아이들에게는 역시나 함께 도울 수 있는 협력자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나누고 베푸는 이들에게 더한 은혜를 반드시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어머니의 삶도 오직 그의 생명의 시간을 가족과 나누었기에 그 생애가 참으로 숭고하고 아름답고 복된 것이다. 자식도 배우자도 필요 없고 오직 자신의 인생을 찾겠노라고 황혼이혼도 불사하는 세태는 결국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인간 스스로의 존귀함으로 내어버리는 것이다. 인생의 존귀함은 생명과 삶을 나눔과 섬김에 있는 것이다. 그 나눔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피와 물과 살을 완전히 다 나눠버린 것이 그리스도이며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유를 취한 적이 없는 분이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예수를 믿고 좇는 사람의 정체도 결국은 나눔과 섬김을 믿고 순종하는 이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원은 소유에서 나눔으로 성경의 삭개오의 주님만난 사건을 보면, 한 인생의 구원에 담긴 참된 회복의 열매는 나눔과 소유의 문제임을 생각하게 한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나누겠으며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한다. 지나온 그의 삶이 온전하지 못하고 철저히 세상에 속한 삶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다짐의 결과 그의 소유는 이제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치, 바울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기뻐하고 기뻐할 충분한 이유를 삭개오는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구원의 분명한 증거가 된다. 삭개오가 그와 같이 나눔의 사람이 되고 나니, 예수님이 선포하신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참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하시며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이런 잃은 자를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참된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을 때, 그 삶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참된 구원은 더 이상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뜻 가운데 사용하도록 반납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주님 주님은 한 인생을 구원하시면서 이와 같은 삶의 열매를 보도록 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장로교 목사이기 이전에 고백적 예정론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필요충분한 적절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을 보라. 주님이 여리고를 찾아가셨다. 이것은 우연히 누구를 만남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만남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소유의 존재로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반납함으로 주님이 쓰시는 인생, 주님께 영광된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인생을 찾아오셔서 그 소유에서 놓임 받게 하시는 분이시다. 제자를 찾아 만나시는 분이지,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데 주를 찾을 수 있겠나? 주님이 찾아주셔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도 주님이 문을 열어주셔야 오는 것이지, 내가 문을 열고 마음대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심방도 사실은 그냥 가는 것이 맞다. 바쁜 시대가운데 심방에 대해 중요성을 간과하고, 심방 받는 집에서 식사도 거의 없어지고 후에는 심방목회자가 집에서 떠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들어가면서 미국식이라고 핑계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주님이 찾으시는 심방이 얼마나 많은가?

반납사상은 회복의 증거 구원에 대해 성경의 두 가지 대표적 표현은 ‘예수를 믿으면’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이다. 마귀는 몰래 담을 넘어 영혼에 침투해오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정문으로 들어오시고 문을 두드리신다. 그를 영접하게 됨으로 비로소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진짜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것이 없어진다. 자신을 반납하는 수준으로 변화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의 것이며,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는 성경적인 반납사상에 의해 삶의 전인적인 변화가 주어진다. 구원은 철저한 세상의 소유사상에서 반납사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인생은 나눔만 되어도 존경을 받는다. 아무리 악해도 자신의 것을 쉬 잘 나누는 사람에 대해 세상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본다. 하물며, 생명을 드린 주님의 나눔과 섬김으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때 너무나 분명한 열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철저한 반납사상이다. 나의 것은 없다는 고백이다. 주님 외에는 더 좋은 것도 더 필요한 것도 더 집착할 것도 없다는 고백이다. 이것이 회복의 증거가 된다. 반납이라는 단어는 왜 사용하는가? 빌려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과 욥 그리고 성경의 사람들 우리에게 욕심과 소유의 사상이 사라지고, 반납 사상이 들어오면 세태를 거스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회복된다. 삭개오에게 나타난 반납사상은 성경의 분명한 증거들로 신실한 믿음의 조상들에게 나타난 동일한 현상들이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낳은 이삭을 바치겠느냐?는 하나님의 뜻에 아침 일찍이 짐을 정리해서 모리아산을 향해 길을 나섰던 아브라함은 온전한 구원을 이룬 사람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정확하게 순종으로 들어낸 그리스도안에 구원의 회복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환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주신분도 하나님,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욥1:21)을 고백하며 입술로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회복된 성도의 모습이다. 한나를 보라. 서원하고 울며 통곡하며 기도가운데 얻은 아들을 그 약속대로 하나님 앞에 돌리고 반납하는 그의 심령은 완전히 하나님 안에서 회복된 성숙한 성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마10: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죽기를 각오하고 주를 좇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사람(마10:38)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은 단순히 어려운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죽음일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지위와 명예를 잃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육신의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널 위해 피 흘려 죽었건만 넌 날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고 하시며 생명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고 계신다. 그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반납하고 나눌 것인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임한 참된 구원은 그 삶의 열매에 있어서 분명하게 소유에서 나눔으로의 회복을 나타낸다. 나눔은 가장 회복된 그리스도인의 세상속의 열매이다. 무엇을 반납하고 나눌 것인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반납의 대상이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음을 본다. 그 실망감의 중심에 나눔과 섬김, 사랑을 실천하면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교회됨의 거룩한 자리를 회복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소유와 반납에 대한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온전한 반납은 가장 큰 영광 구원받은 백성은 모두 주님의 철저한 소유가 되어야 한다. 삭개오뿐 아니라, 믿음이 선진들 뿐 아니라 말세를 살아가는 내 이름도 아시고, 내 생각도 아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나는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됨으로, 세상의 소유를 주님께 반납하고 나눔의 사람으로 섬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 그가 바로 영원한 승리자가 된다. 나누고 섬기고 반납하면... 그렇게 살면 망할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을 성경은 약속한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바보같이 살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도 많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로서 온전한 반납의 삶을 살았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큰 영광을 누리게 됨(마10:39)을 증거한다.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반납하고 포기한 사람에게는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과 인도하심이 따를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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