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구별의 기준이 모호한 세상 어느 기독교 학교에서 신입생을 뽑는 면접 자리에서 학생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더러운 세상에서 좋게 살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다시금, 시험관이 무엇이 더러운지 물었더니, 친구들 중에 자기 맘에 안들면 밟아버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학생의 말을 더 들어보면, 세상에는 더러운 것과 좋은 것이 있는데 자기는 좋은 것을 따라 살고 싶다는 말이라고 한다. 좋게 살고 싶다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지만, 이 학생의 문제는 무엇이 더러운 것이며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직 분명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것과 좋은 것, 나쁜 것과 착한 것을 느끼고 살지만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착한 것’이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면 ‘더러운 것’이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것이 되고, 자기 생각에 좋으면 그 어떤 악한 일도 선으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문제는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사회적인 영향력이 커질수록 심각한 문제가 된다.
참지 못하는 세대 최근 한국의 한 청년이 자신을 모욕하고 무시했다는 이유로 같은 방에 살던 열살 연상의 룸메이트를 죽여서 토막내어 호수에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신원이 공개되었을 때 한국에서 보통의 일상적인 거리에서 만나봄직한, 어쩌면 쉽게 말하는 교회오빠 같은 얼굴을 한 청년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그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할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임을 부인할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착해서 착한 것이 아님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신불신간에 우리를 붙들어줌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삶을 지탱해가고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기본이 없는 고집스러운 자기중심성 분명한 기준이 모호한 시대의 특징은, 감성주의와 상대적 가치관이 득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하데 접촉되어 나타난다. 상대적 가치관이 심화 전도되면 지나칠 정도의 고집스러운 자기중심성이 나타나게 되고 더 깊은 나이테의 심연에는 조절되어 참지 못하는 극단적인 감성주의가 들어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준이 애매하면 인생은 감성과 이기주의와 절대가치가 부재한 상대적 가치관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는 것은 죄성 가득한 고집밖에는 없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몸집의 크고 작음과 힘의 강소에 상관없이 ‘내버려둬, 나 이대로 살다 죽을래’ 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심지어 성경적인 언어까지도 침투할 수 없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행위의 기준자체가 없거나 모호한 사람들이다. 기준이라는 것을 따라 가보면 기본의 문제에 이르게 되는데, 기본이 결여됨으로 고집스러운 자기중심성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고집스럽기가 그지없는 미성숙한 성인아이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유와 평안을 얻으려는 인생의 죄의 속성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불법의 시대와 신앙의 기본기 신앙과 삶에 기본기가 회복되어야 한다. 기본기를 통해서, 기준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되고 감성을 조절하며 자기중심성을 지나서 본래의 인간됨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기준이 모호해진 세상은 조금만 그 기준을 바르게 하여도 저항의 힘이 드러날 것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의 법은 더욱 선명하여 질 것이다. 진리가 혼돈된 시대를 살아간다. 진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낄만한 시대이다. 지난 주 신문을 보면 세상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그 죄의 어두움은 더욱 짙어졌음을 보게 된다. 유럽나라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가 그나마 로마교황청의 영향으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 반대해온 분위기였는데, 마테오 렌치 총리가 자신의 신임문제를 걸고나와 공식적으로 동성부부의 합법화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더불어 이제는 자녀입양권까지 입법화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신앙으로 기도의 아버지들로 세워진 미국마저도 이에 대해 적극지지입장을 천명한지가 오래 되었다. 동성애 문제에 식견을 가진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면, 이러한 인간의 동성애적 경향은 후에는 동물과의 성적관계를 원하는 수간 행태로 발전할 것이라고 한다. 실제 유럽의 어느 나라는 동물을 보호하기위해 수간금지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동물의 생식기의 약함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법의 제한을 받게 한 것이다. 사람이 짐승만도 못한 세상이 되어지고, 짐승보다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에 사람이 살게 되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한몸이 되도록 결혼제도를 만드셨음을 말씀하지만, 이제는 잣대와 기준으로서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심각한 불법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뜻을 정함이 기본기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과연 힘들지 않은 시대가 있었는가? 신앙을 가진 자들도 세상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금 하나님 안에 소망이 있음을 오직 믿음으로 확정하고 다시 새로운 눈을 뜨게 될 때, 기도의 무릎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다니엘 시대는 철저한 절망에서 시작되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성전의 기구들이 바벨론의 마르둑 신전으로 옮겨지고 조공을 바칠 뿐 아니라 왕족과 귀족의 어린 자녀들을 데려가 저들의 먹는 것과 입는 것, 저들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하며 길러서 왕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했다. 어찌보면 조국은 망해도, 자신들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자신들이 섬긴 여호와 하나님마저도 자신들을 버린 듯 보이지 않는가? 그러한 때에, 다니엘은 오직 믿음 안에서 뜻을 정한 것이다. 뜻을 정하는 것 자체가 소망이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음식과 이미 망한 나라의 신으로 치부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금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뜻을 정한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믿음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정한 뜻의 실체가 무엇인가? 보통 뜻을 정했다고 하면 삼국지의 도원결의와 같이 세상을 바꿀 소원과 결연한 의지를 생각하지만, 이들의 정한 뜻은 먹는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삶의 기준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대단한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계획이 아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신자가 거룩하게 살겠다. 하나님을 믿는 구별된 자로 살겠다.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다. 기준이 모호한 세상 안에서 참된 신자가 살아가는 길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는 그것을 순전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세상을 거스르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기본기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 다니엘은 세상을 바꿀 위대한 계획도 비전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정도로 축복하셨다. 훗날에 그가 다리오왕 때, 노년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도 다른 것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이 하루 세 번 기도했던 것이다. 신자로서의 당연한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심을 보게 된다. 위대한 일을 꿈꿀수록, 당연히 해야 될 기본기를 잘 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싹이 자라는 것을 보며 미래의 열매를 짐작하게 된다. 현재의 모양으로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도 어릴 때의 모습으로 미래를 짐작하듯이 어릴 때 잘 잡혀지는 것을 기본기라고 말하는데, 이 기본기에 따라 인생의 열매가 좌우되는 것이다. 신앙의 기본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승리한다. 기본기가 분명한 신앙과 삶은 어리석고 비정상적으로 보여지는 삶의 정황가운데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다니엘 당시 고대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패망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는 다 무너진 상태처럼 보였고, 하나님도 저들을 버리신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대세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과 마르둑신이다. 마치, 선민인줄 알았는데, 성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지 않냐고 저항할만하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평생 하나님을 믿었는데, 평생 충성하였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신실하게 믿은 사람의 실패 현상 앞에 더 많이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다니엘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신실하게 뜻을 정한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오직 믿음 한가지였다. 이것이 세상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 앞에 신앙의 기본기가 된 사람의 모습이다. 한결같은 말씀과 기도의 기본기가 그의 삶에 선명한 기준을 제공하였고, 세상 물결에 휩쓸려 이리 저리 치우칠 수 있는 때에 마음에 중심을 두고 하나님 앞에 칭찬과 인정받는 삶을 살아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고집대로 평안을 누리겠다고 하는 것은 죄의 영향력이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출발할 때에, 베드로 사도의 외침은 내 방식과 고집대로 살아가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베드로의 회침에 응답한 저들의 회개와 세례는 삶의 기준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의 기본기는 자세와 태도의 문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레는 십남매를 키우면서 독특한 교육방법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3살이 되기까지 완전히 기를 꺾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신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일찍 꺾어야 바르게 자란다는 것이다. 주입식 성과교육이 아니라, 자세와 태도에 대해 먼저 정리 정돈한 것이다. 아무리 줄기 가지 무성한 나무를 이식한다 하여도 토양이 잘못되면 나무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식당에서 경험한 몇몇 엄마들 기준에서 보면 말이 안될 일이다. 식당에서 애들 뛰면, 그것을 식당주인이 자제를 시키면 ‘애 기죽이지 마라. 식당이 여기만 있나’하고는 단번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짐승도 방목하면 야생에서 약육강식에 의해 먹혀죽을 따름이다. 방목의 세계에서는 힘이 제일 우선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집에서 길리운 유목한 짐승은 약해도, 살아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적절할 때 사람을 보고 짖을 줄도 알고 철이 들어가는 것이다. 흔히 부모들 가운데, 때가 되면 철들겠다고 하지만 그 철이 들기까지 부모의 심장은 시커멓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세대의 DNA속에는 사무치는 교육열이 있음을 보게 된다. 집요할 정도로 자녀들의 공부와 성공에 집착한다. 뱃속의 태아 때부터 시작하여, 유치원 입시와 과외로 충만한 초중고 시절을 지나, 대학입시에서 최정점을 찍는다. 수능이라는 대입시를 앞두고는 이를 위한 특별기도회와 군대 간 후에는 ‘헬리콥터 맘’이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의 군생활에도 전투훈련장을 누비면서 쫓아다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운전하도록 키움이 아닌, 부모의 대리운전이 너무 쎄서 나이가 서른이 넘어도 성인아이로 스스로 무엇인가를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 된 것이다. 기본기가 무너진 가정과 사회 개인의 미래는 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은 반복이고, 반복은 실력이다. 군대 가면 제일 많이 하는 훈련, 가장 먼저 하는 훈련이 제식훈련이다. 기본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기본이니까 계속해서 반복해서 뼈와 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신학사상에 앞서서 기본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하나님이 맺게 하실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복은 실력이다! 음악악기를 다루기전에 튜닝의 과정을 반복하듯이,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반복을 통해 익숙해지고, 그것이 그의 삶을 견인해가도록 해야 한다. 엘리트 교육을 한다고 전인교육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자세가 중요하다. 기본기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신앙의 기본이 되어졌을 때, 기술을 가르쳐도 늦지 않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눈 그 신앙의 기본기가 무엇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정리되어질 때 비로소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민교회들 가운데 2세 교육을 책임지는 교회라고 비전을 선포하는 것을 본다. 그런 교회를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나타나는 현상이 심각함을 본다. 영어로 하는 사역자들 불러서 선데이 스쿨 하면서 베이비시팅 하면서 차일드케어 하는 수준에서 피자 시켜먹고 기타치고 잘 놀아주면, 그것을 2세 교육이라 생각하고 맡겨놓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영어로 하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모습 속에 제대로 된 신앙교육의 내용이 무너져가는 것이다. 특별한 흥미와 재미를 넘어서서 가르칠 바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기본기가 든든한 교회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씀과 세상을 해석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일반 문학작품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방법이 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데 한 마디도 작가의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지만, 작가는 그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조연,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지는 말을 통해서, 내용상 작가가 그 사람들을 통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의도를 다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에 전지적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하고, 이 관점으로 어떤 사건이든, 어떤 주인공이든 무슨 말을 했던 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하게 된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몰으셨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로 가게 하셨다고 읽는다. 다윗이 광야로 갔더라고 기록하지만, 다윗 속에 하나님의 마음에 광야로 가게 하셨기 때문에 광야로 가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와 있지만 오늘 내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셨다.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해석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의 모든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일조차도 논리를 넘어서서 마침내 하나님의 권위에 항복하게 되는 것이다.
기본기는 보여줌으로 가르쳐지는 것 이민교회의 정체성을 연구한 목사님들 공통견해중의 하나가 신앙의 뿌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조금 부흥하고, 조금 좋은 듯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순간에 공중분해 되듯 폭발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뿌리가 약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민교회 역사가 짧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교회와 같은 깊은 신앙의 뿌리를 가진 믿음의 앞선 이들의 신앙의 본을 보지 못해서, 본 바가 없어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 무너져 간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앙의 기본기를 가르쳐야 한다. 반복해야 한다. 더불어 본이 되어야 한다. 구약성경 잠언은 지혜의 왕 솔로몬의 작품이다. 전반부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내 아들아! 내 아들아!’이다. 그 아들이 누구인가? 르호보암이다. 아들의 삶에 대해 깊이 간섭하는 아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역대하 12장 14절을 보면, 그 르호보암에 대해 평가하기를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으로 악을 행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아들을 교육하기에 좋은 훌륭한 글을 썼지만,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솔로몬 자신이 집권초기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배와 기도의 삶을 살았음에 비해, 후반에 그의 사는 모습은 인간적인 성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고 궁정 안에 우상을 끌어들여 하나님 앞에 타락한 삶을 보여준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주어도, 앞선 이들이 의식하면서 삶으로 본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은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해라 말씀하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 바르게 살라고 말하면서, 먼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내야 한다, 인사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혼돈한 시대에 영원한 그루터기 분별이 모호한 시대, 참지 못하는 감성의 시대, 카오스와 같이 혼돈된 시대를 살아간다. 신앙의 기본기를 회복해야 한다. 거대한 비전과 구호가 아닌, 가장 기본적인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무엇보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뜻을 정해야 한다. 그곳에서 신앙과 삶의 회복, 세상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회개와 세례를 통한 구원받은 백성으로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신앙과 삶의 기본기는 연약한 인생으로 하여금 기준 있는 삶을 만들어 내며, 혼돈되고 자기중심성에 빠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고 거룩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그루터기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낼 것이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