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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하는 세상에 대한 성도의 참 부요함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마5:3)과 가난한 자의 복(눅6:20)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최대의 장애요소를 말한다면 포기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성과 물질과 쾌락을 사랑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물질중심적인 현 시대에 믿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돈'일 것이다. 바울도 사람들이 말세에 이르러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며 물질의 부요함을 통한 쾌락을 추구함에 대해 경계할 것(딤전6:10)을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세속적인 흐름에 대해 늘 시험당한다고 할 수 있다. 돈으로 권력을 사고, 돈만 있으면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얻기도 하고, 혹자는 교회를 통한 종교적인 성취의 즐거움도 돈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을 본다. 믿음 없는 사람의 말로 치부하기에는 가시처럼 걸리는 게 많습니다. 물질이 교회에 꽤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심심찮게 교회건축을 앞두고 직분장사(?)를 하기도 한다. 신성한 직분이 신앙자체보다는 곧 물질의 책임분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성도의 삶과 분명한 물질관 이 시대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복되게 살고자 할 때, 물질에 대해 관점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고는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주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의 실패와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베드로와 요한의 기적사건을 볼 때, 물질관과 믿음 있는 성도의 삶은 분명히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한다. 은30이라는 물질에 매여 오고가는 세대에 가장 불쌍한 자가 된 유다에 반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은과 금이 아닌 구원자 나사렛예수 이름의 능력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능력을 드러낸다. 이처럼 참된 성도는 물질의 권세가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물질로서 불가능한 믿음의 능력을 드러내도록 요구받는 사람들인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되, 저들이 필요이상의 여유 돈을 둘 만큼 하지는 않으셨다. 마태복음 10장에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전대에 은이나 금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해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주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데리고 다니실 때, 그들 가운데 헌금궤를 담당하는 제자가 있었고, 물질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남기셨음을 본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것도 가르치셨으며, 생선과 떡덩이를 통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결코 제자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에 매여 땅에 보화를 쌓아두는 삶을 살지 말 것을 또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사명에 적합한 물질의 사용 이것은 규모 있고 계획성 있는 쓰임을 위해 물질을 구하고 사용하되, 순례하는 전도자로서 그 제자의 직임에 방해가 될 만큼 소유하지는 말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사명에 적합한 물질을 소유하며, 구하여 얻으나, 물질자체로 인해 사명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염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열심히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사역자도 직업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것이 염려할 정도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전임사역자도 바울처럼 일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복음사역을 감당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굶더라도 사명을 감당하거나, 아니면 부르신 자는 반드시 책임져주신다는 주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욕심 많은 그리스도인 교회에서 매년 봄가을에 ‘행복의 초대라는 이름으로 전도 잔치를 가진다. 한인인구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이지만, 아직도 한인인구의 절반이상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과 넓게는 타민족 선교차원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이 명령한 것이어서 부흥회와 겸해서 전도 잔치를 하게 되었다. 이 시즌이 되면 여러 소리들이 목회자의 귀에 들려온다. 교회의 초청을 거부하는 이들의 항변을 낮은 마음으로 들어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가 팩트로 저장되어 나타난다. 듣다보면 마치 속살을 드러내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거칠게 대항도 하고 싶은 복잡 다양한 마음이 생겨난다. 마치 자식을 통한 부모의 평가를 듣는 것 같다. 물론 그 평가가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듣듯이, 상처 입은 불신영혼의 실내용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힘들지만 유익하다. 최근에 부쩍 많이 듣게 되는 소리는, 예수쟁이들은 자기중심성이 강하다, 베풀지 않는다, 손해보지 못한다, 돈이면 의리도 인격도 소용없다.... 결론은 그 이전투구에 몸담을 이유가 없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비록 저들의 소리가 철저히 세상의 관점에서 행해지는 언어라 할지라도, 교회가 사용하는 물질의 방향이 너무 자기 욕심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좋은 성도, 바른 교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잘못된 교회만이 드러나서 그렇게 호된 소리를 듣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물질에 대해 지나친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불신자들에게는 자기 배만 채우는 욕심꾸러기로 보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돈의 용처가 마음의 방향 물질의 중요한 기준은 사명의 유무이다. 사명 때문에 돈을 가지고 있어서 회계하는 제자도 필요했고, 사명 때문에 돈 없이-두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가 소유한 물질의 액수와 사업의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 하나님의 인정과 그의 기뻐하심을 기대할 수 없는 지나친 경제활동은 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명과 관계없는 물질이 될 때,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어떤 분은 열심히 사업을 하시는데, 그러다 보니 주일을 섬기는 것보다 사업이 늘 우선이 된다. 이 분이 늘 입에 달고 다니시는 말이 ‘돈 벌어서 크게 한번 교회를 위해 쓰겠다’는 말이다. 참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크게 한번 하나님을 돕겠다는 그런 한탕주의신앙보다는, 지금 당장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복하며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데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 같은 사람이 없으면 제대로 일도 못하실 분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의 현재의 물질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짐으로 그의 열심 있는 현재의 삶도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가난한 자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복음)와 평지설교(누가복음)는 그 교훈 점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주린 자를 의미한다고 여겨,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의 복(눅6:20)을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마5:3)으로 해석의 실마리를 찾는다. 하지만 그에 반해 진보적인 해석을 취하는 입장에서는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의 복을 문자 그대로 물질적 빈곤을 느끼는 삶의 가난에 젖어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일차적으로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복이 있나니..."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애써 가난에 처할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목사는 가난해야 목회를 제대로 한다는 말까지 한다. 마태와 누가 둘 다 성령의 영감으로 예수님의 설교를 기록했는데 왜 해석이 이다지도 구구할지를 생각해보면, 필자의 기본적인 관점이 있지만, 이 구절에는 예수님의 놀라운 변증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적용을 형평에 맞게 하라는 교훈 즉,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물질에 대해 항상 명심해야 할 대명제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가치중립적, 태도가 문제 우리는 가난과 부에 대해 매이지 않고 자유할 필요가 있다. 가난이 의롭게 산 흔적이요, 하나님의 연단이라면 복된 것이다. 부가 성실의 열매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할 복의 통로가 된다면 극히 좋은 보물을 가진 것이다. 성경은 가난을 미화하지도 않지만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돈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죄악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성경은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언제나 물질이 있고 없고를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는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성경은 도리어 우리가 깨끗한 부자가 되어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개인영성과 사회공의 보수적 복음주의는 영적인 가난만 자꾸 언급하여 내가 섬기는 하나님만을, 진보적인 입장의 신학은 사회구조악적인 물질적 가난에만 치중하여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에만 강조점이 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의 위대한 두 강령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22)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주류를 이루는 복음주의 진영에선 개인의 죄를 다루는 개인영성과 사회적 죄악을 다루는 공의적인 측면을 함께 강조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의 하나님께 회개하고 통회하는 기도제목이 주일을 범하고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시간과 제물의 청지기적 사명을 구현하지 못하는 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시간이나 재물을 기꺼이 드리지 못하는 죄까지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경건생활의 강조에서 기도회나 예배참석 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도 하나님께 향하는 경건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가난한 자 딤전3:16의 “경건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중심을 둔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헌신과 행위의 근원이며 규범이며, 사도행전10장에 나타나는 “경건한 자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하상 기도하는 자(2절)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예배, 전도, 교제, 교육을 통한 본래의 사명 즉,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중생한 영적 체험에 대한 열매와 결과로서 이웃섬김과 사회봉사 등의 영역에도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외침에 귀를 열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을 확장하는 것에 마음을 굳건히 하여 진정 “가난한 자”에 처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부자됨과 성도의 부요함 부자는 소유의 개념이고 부요는 존재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는 물질을 많이 소유하여 쌓아 두는 사람이고, 부요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복되게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바울의 삶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좋은 환경들이 없었다. 가정도 없었고 가난했으며 일생을 나그네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았고 언제나 소망을 품은 삶이었다. 그의 가난함을 하늘의 부요로 채웠던 것이다. 그가 친히 말한 대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물질중심의 세상에 대해 이렇게 물질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에 대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빛을 드러내는 삶은 어떤 것인가? 물질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되, 물질을 관리하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이 반드시 경건하다”든지 “부하고저 하는 것은 죄다”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가난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언제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궁핍이 우리에게 천국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거나 영적 경건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풍요로움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듯이 가난도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마음의 자세이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가난함을 잊어버린 성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손에 쥘 수 있어도, 주님의 말씀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지팡이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할 만큼-그러나 가장 복되고 영광스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삶의 다양한 부분이 물질욕심에 의해 오염되었음을 본다. 사역자의 삶에도, 목회에도 많은 오염된 흔적을 발견한다. 주일 헌금액수가 마치 사업장 매출액처럼 목회자의 얼굴의 희비를 예민하게 좌우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그 영향으로 참된 그리스도안에서 남을 유익하게 하는 가난함을 잊어버린 성도가 배출되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의 목회야망을 위해서 성도들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다. 기준이 분명한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두고서, 물질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사랑 하는 일로 가난할 수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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