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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대하여

- 정치는 현상이며, 본질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현실참여와 보수신앙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가졌던 현실참여와 보수신앙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동일한 문제로 등장함을 보게 된다. 87년 대선을 지나면서, 교회 목사님이 늘 장로 대통령, 장로 대통령하시면서 YS를 지지하는 그래서 온 성도들도 함께 장로 대통령이 되기를 기도했던 적이 있다. 마음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절로 YS로 각인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익숙하다보니 무슨 문제이든지 판단의 기준이 ‘저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냐? 아니냐’로 모든 가치관이 단일화 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YS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이사야 43장10절 말씀이었는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 그것 또한 온 교회 열심있던 성도들의 마음속에 더불어 사모하는 말씀이 되어서 대표기도 때마다 자주 등장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당시 87년 선거의 결과는 보통 사람 노태우가 되고 장로 YS가 떨어졌던 것이다. 군정종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때 목사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되어진 것은-모든 되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 앞에, 몇 성도들이 물었다.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장로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나라 만세이지 않는가? 그때 다시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 합당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미루신 것이 아니겠나?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를 따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데, 때가 되면 하나님 당신이 하실 일을 꼭 하실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말씀이었던 것 같다. 그 말씀이 지금은 모든 신앙과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철칙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것만큼 억지 끼워맞추기식의 답답한 답이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 롬 13장에 의하면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권세에 순종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권세잡은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안하시느냐에 있지 않을까. 권세엔 굴복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은 권세를 가진 자에게 굴복하기는 싫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권세 가진 자의 정치에 굴복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정치현상이 결코 기계적인 사회 시스템의 작동이 아니라, 인간의 지정의를 통한 선택과 책임의 행위임을 의미한다 하겠다.

피할 수 없는 정치현상 눈을 뜨면 보지 않을 수 없고,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정치이다. 이를 정치현상이라 한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현상 너머에 있는 ‘공동체를 통한 인간의 자기복리라는 끊임없는 투쟁’이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원한 것도 영원할 수도 없는-부정하거나 회피할 수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행위가 국민들에게는 선택의 이름으로 공동체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의 미국과 한국의 정치현상 최근 정국의 최대관심사는 민주/공화 양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정하여 11월 8일 화요일에 있을 대선에 대한 것이다. 민주당은 힐러리 클린턴이 거의 대세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공화당은 속내가 상당히 복잡하게 보인다. 트럼프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워낙 돈키호테 스타일의 막무가내식으로 전개되는 그의 정치적 행보들이 공화당의 전통적인 이념과 정체성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후발주자가 그에 대해 전세를 역전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현실이기에 대선을 향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은 4월 13일에 치러질 총선과 2017년의 대선을 향한 예비전으로서 상당히 복잡한 당 내외 갈등 분쟁 타협 등의 정치적인 이슈들을 막장 드라마처럼 생산해내고 있다. 각 당들이 뱉어내는 정치행위는 결국 각 당파의 이익을 찾기에 우선하고-그 정파적 이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급급하다. 여당 안에서도 각 계파의 이익을 당의 정체성보다 더 나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애국심마저 넘어서기를 하고 있다. 야당은 지역의 일꾼을 뽑는 총선임에도 내년에 있을 대선만을 염두에 둔 듯, 건전한 야당의 역할보다는 이전투구의 거친 싸움을 드러낸다.

정치현상과 이민자 미국적인 격이 한참 떨어지는 미국대선에서 보여지는 일단의 정치꾼들의 모습과 최근 한국의 총선을 앞둔 변함없는 구태로 얼룩진 각 당들의 입장들을 보면서 자꾸만 얼굴을 돌리게 만든다. 기도의 끈을 놓게 되는 것을 본다. 별사람 있겠나? 어쩔 수 없는 차선의 선택일 따름이겠지, 덜 나쁘고 덜 악한 인간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것을 본다. 특별히 이민의 땅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정치적 이슈가 더욱 무심하게 대하는 모습들을 본다. 중요하지만, 중요한 만큼 해결할 수 있는 영향력이 너무나 미미하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에 부합하는 정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하더라도 삶의 문제에 급박하여서 변두리 소식 정도로 치부하고 무관심의 영역으로 던져두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치현상에 대한 냉소주의적 태도는 소수의 입장에 서는 약자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태도의 범주에 해당된다. 그러나 인종 피부색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은 이 우주의 어느 한 곳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는 영역이 없음을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치현상에 대해 각기 다른 소견을 가진다하더라도, 가장 큰 전제로서 주변의 정치현상에 대해 성경에 의존적인 조망을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육체를 담고 있는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진리와 의로 드러나게 하는 복된 길의 시작이 된다. 더불어 신앙과 대치되는 일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자기합리화와 비등한 비관주의 혹은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게 할 것이다. 기도의 선한 제목들을 발견하며 이 모든 정치현상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선지자의 눈과 제사장의 마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치현상에 대해 공동체를 기반으로 선지자의 눈과 제사장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적절한 관심과 참여를 통해 그 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헤롯과 헤로디아에 의해 목베임을 당한 세례 요한의 외침을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말하는 지 기억해야 한다(막16:17). 하나님의 말씀을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했던 다니엘(단4:19, 5:17), 사무엘(삼삼13:13), 나단(삼하12:12), 갓(삼하24:11), 엘리야(왕상17) 등 많은 선지자들의 행적은 다스리는 자들과 그들의 통치행위에 대한 분명한 선지자의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선지자의 눈과 더불어 또한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제사장의 마음이다. 조국과 민족과 사회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제사장의 마음으로 정치현상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창19:22), 에스라(스9:5), 예레미야(렘32:16)와 같은 기도가 민족과 국가와 정치인들을 향해서, 정말 사랑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어 외칠 뿐만 아니라, 진지한 기도의 시간을 통해 공동체적 책임을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선택과 공동체의 책임 정치행위는 공동체 안에서 선택의 요구와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몫이다. 그 몫을 고스란히 지고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영적이며 도덕적인 힘으로 정치 공동체가 더 이상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더 이상 부패하고 타락하지 않게 해야 하는 권리와 책임이 있다. 혹자는 기도와 더불어 교회가 복음에 비춰 현실을 평가하고 사회 안에서 실제적인 선택의 행동지침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복음에 일치하여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과감하게 외칠 수 있고 동시에 이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공동체가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게 될 때, 그 폐해를 구성원 각자가 그대로 덧입는 것을 본다. 가데스바네아의 10명의 정탐꾼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해 40년간 250만의 1세대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본다. 공동체가 정치결사체에 대한 선택의 결과에 의해 민족의 흥망과 개인의 희생과 회복이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적인 마음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더불어 제사장의 마음으로 나라와 조국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선택: 믿음과 양심, 진리, 자비와 긍휼 정치현상을 바라볼 때, 주의할 것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정치는 현상이라고 말했듯이 현상의 선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현상에 대한 이해는 본질을 전제한 선택이다. 가장 전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믿음과 양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세상질서의 회복을 생각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더불어, 진리에서 파생된 선택의 기준이다. 국민은 선거에 의하여 공직자를 선출하고 자신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시킴으로 국가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도성은 하늘나라-천국이기에, 우리의 선택의 기준도 또한 영원한 진리의 말씀과 그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의 세 번째는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드러나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이웃사랑과 약자의 배려에 대한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미국을 예로 들면, 가진 자들의 특권을 더 유지하는 쪽이 아니라, 소수인종과 약자들을 배려하는 정책에 부합되는 정당과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은 사람-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정자 결국 정치현상의 중심은 사람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정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전역사가 증명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정치행위에 있어서 복된 위치를 지키며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선을 향해 경주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과 공동체 앞에서 진실함이라고 할 수 있다. 위정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찌라도 변치 않는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시15:4)이심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이 위정자에 대해 선택과 허용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간다고 할 때, 많은 고난과 환란이 수반된다 할지라도 죄가 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경우라면 그 약속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브온 족속과 맺은 맹세를 지킨 것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겔17:19, 수9:19). 그러므로 모든 공동체의 위정자가 될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말들에 대해,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신들의 맹세를 지켜가야 한다.

실패한 정치가 사울은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않는 자였고(삼상19:6), 위대한 정치가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의 맹세(삼상24:21, 20:42)를 하나님 앞에서 지킨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11월의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한국의 총선과 2017년 대선을 향해 달려가는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신실함과 진실함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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