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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恩惠)와 행위(行爲)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은혜로 사는 삶과 행위로 사는 삶은 정반대다. 은혜는 하늘로부터 임하고 행위는 세상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 새번역). 행위에 대한 적절한 설명도 있다. 사도 바울이 한 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고전3:6). 이를 우리는 진인사(盡人事)라 부를 수 있다. 즉 행위가 결과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행위에는 대천명이 더해져야만 한다. 단어도 진인사대천명이 되어야 격에 맞고, 말씀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여야 문장이 완성된다. 은혜가 완전하며 완성이라면, 행위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것이다. 세상은 은혜를 알지 못한다. 심고 물을 주는 것은 말 그대로 행위일 뿐이다. 생명이 깃들어 있는 씨앗을 심었다 하여 그 생명을 주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깃든 씨앗에 물을 주었다 하여 그것이 생명을 싹틔우는 것도 아니다.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시동을 걸었다 하여 열쇠가 자동차의 주인은 아닌 것과 같다.

다만 은혜가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 자연의 섭리는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지만 사람과 관계된 세상사는 모두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생육하고 번성할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물속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다. 그냥 허락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신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에 의한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담당하시고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으신다.

은혜와는 좀 다른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언제 밥을 먹을 것인지, 언제 잠을 잘 것인지 등의 문제에 해당한다. 하루 세 끼의 밥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기보다는 허용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허락된 삶을 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력(努力)이라는 것도 행위에 속한다. 여기서부터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는 사람의 순종과 영원한 변화를 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한다. 에덴동산에서 교묘한 말로 여자를 유혹했던 마귀는 사람이 순종하는 것과 영원히 변화되는 것을 사람의 노력의 결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하라고 한다. 네가 땀 흘리며 각고의 수고를 다한 결과가 어찌 하나님의 은혜냐며 그것은 당연한 네 몫이라는 것이다.

교만(驕慢)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다. 하나님께서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열매 앞에서 마귀가 여자를 부추기며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 네가 그것을 따서 먹으면 네가 곧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네 위에 하나님을 두지 말고 네가 하나님처럼 되라고 했다. 노력도 그렇다. 네 수고의 결과를 왜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냐는 것이다. 노력 즉 수고의 결과는 당연히 네 몫이라는 것이다. 심고 물을 주는 것으로 자라나는 생명이 부여되진 못한다. 모든 생물의 생명은 다 사람의 몫이 아닌 하나님의 몫이다.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미혹하여 영원한 죄인을 만든 마귀는, 죄인을 구속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얻은 사람의 생명을 되빼앗으려 온갖 술수를 다 쓰고 있다. 행위로 나타나는 한 모습인 노력을 선악과처럼 이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이루어진 모든 것의 영광을 100% 받고 싶어 하신다. 그런 전제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나는 2003년 중국 계림의 선교현장에서 선교영화를 만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순종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순종할 수가 없었다. 파송교회조차 없는 가난한 선교사의 입장에서 가당치도 않은 일(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핑계했다. 한국의 유명한 대형교회와 목사님에게 그 비전을 주시라고 떠넘겼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나는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환도뼈가 위골되도록 겨룬 씨름과 비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피하고 싶은 심정은 처절했다. 그러던 때 하나님은 내 심령에 일침을 가하셨다. 네가 하느냐는 것이었다. 네가 하느냐는 물음은 너는 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감동이 “나는 그들이 99%를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1%쯤은 내 몫이라는 사람의 행위조차 불가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수십만의 성도가 있는 대형교회는 누가 조성했을까? 똑똑하고 박식할 뿐 아니라 언변까지 좋은 목사의 능력일까? 그렇다 치자. 그런 목사는 자신의 머리털이 몇 개인지 알고 있을까? 자기 몸에서 엄연하게 운용되고 있는 생명의 신비를 알고 다스리며 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을까? 심장이 어떤 힘으로 뛰어야 그 몸 구석구석에 피를 공급할 수 있을까를 계산하고 그 계산대로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일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욥이 고백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대형교회가 아니라 나라를 넘어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권세를 가졌다 해도 그 전부가 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대형교회의 목사에게 선교영화를 제작하여 공산권, 이슬람권, 힌두교권에 상영되게 하라는 비전을 주셨을 때, 그들의 입에서는 1%쯤은 거침없이 싹둑 자르고 99%만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너는 다르다고 하셨다. 너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그런 상태가 못 되니 1%가 아니라 0.1%도 네가 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 선교영화를 만드는 엄청난 비전을 주신 이유라고 하셨다. 단 0.1%의 행위조차 허락하시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것은 사탄의 하찮은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버린 사람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 죄의 삯인 사망에 매여 버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셨다. 독생자를 그 처참한 십자가에 죽이셔야 했고, 어렵사리 되찾으신 사람을 미혹하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탄을 방비하기 위해 성령을 불침번으로 세우셨다. 사탄에게 여지없이 뚫려버린 에덴동산을 지키시기 위해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신 것보다 더 엄중하게 사람을 지키시려고 사람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세상을 향한 외침이어야한다. 은혜가 아닌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세상은 지금 불행하게도 수고한 노력의 결과에 매여 있다.

사탄의 속임수인 궤계에 다시 농락된 결과다. 이 풍요로운 대명천지를 만든 것이 다 사람들이 땀 흘려 수고한 결실이라고 한다. 한국에도 이는 팽배되어 있다. 한강의 기적이니 새마을운동의 산물이니 하면서, 백세시대를 노래하는 기성세대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는 젊은이들에게 무용담이라도 들려주듯 보릿고개를 겪으며 허리띠를 졸라맨 채 밤을 낮 삼아 일하느라 굵어진 손마디라고 거칠어진 손을 표창장처럼 내보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오늘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신명기 11장 8-12절에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소개하고 있다. 구약의 곳곳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설명하는 가나안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거짓이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광야와 사막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곳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곳을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는 행위다.

그러나 성경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관심하시고 그의 눈길이 머무는 땅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말씀으로만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된 것이 이 세상이다. 이것이 은혜다. 은혜와 행위는 이렇게 다르다. 가난하고 척박하기로 말하면 한국의 이전은 더 심했다. 그런 한국을 하나님이 관심하시고 눈길을 두시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이렇게 번성케 되었다. 사람의 행위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뤄내신 것이다. hanmac@cmi153.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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