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세상은 지식을 학문과 상식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 알기다. 지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지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가방끈이 긴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경을 보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문득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것은 사람의 한 짐과 하나님의 한 짐의 격차 때문이다. 다시 말을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버리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정 여하에 따라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존재가 달라지지 않는다. 더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어떤 위해나 위협도 되지 않는다. 개미가 1m 혹은 100m의 높이에서 뛰어내린다 하여 지축이 흔들리는가? 절대 아니다. 그저 개미가 떨어져 즉사할 그 자리의 먼지 몇 알갱이가 1,2cm쯤 풀썩이다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버리는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 희망을 품어서도 안 되고 품는다 해도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는 진리의 말씀을 생각해보라.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의 가고 서며 앉고 일어섬이 주님의 허락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면 천상천하의 어떤 존재도 그것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상관없이 미동조차 할 수 없다.
욥을 시기하며 모함하던 사탄조차 하나님의 일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을 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1:6-12). 사탄은 자신의 호언장담대로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욥을 다시 고소하기 위해 하나님을 충동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충동에 무너지신 것이 아니라 욥의 신실함으로 사탄의 코를 납작하게 꺾기 원하셨다. 그래서 두 번째 사탄은 욥을 해할 궤계를 꾸며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는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2:3-6).
이 때 욥의 말이 바로 크리스천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죽었고 그 많던 재물이 다 사라지고 욥은 집마저 무너진 잿더미에 앉아 전신에 퍼진 종기의 고통을 깨어진 질그릇 조각으로 긁으며 신음하면서도 주님의 뜻이라고 했다. 사탄의 충동만 이겨낸 것이 아니라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그의 아내가 악에 바쳐 “우리의 꼴을 봐! 하나님이 있다고? 그 잘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차라리 그 하나님 실컷 욕이나 하고 뒈져!”라고 충동을 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욥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것은 자신의 신실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탄의 궤계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믿는 자들이 바로 알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께 올려드릴 영광과 찬양(사43:7, 21 참조)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임을 욥은 알고 있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욥을 해하려던 사탄은 그로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겪었을 것이고 욥의 아내 또한 그 말에 대한 책망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든 모욕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사탄은 욥에게 해를 입히려고 획책했으나 그것은 욥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한 죄가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궤계를 꾸며 사람을 모함한 줄로 알았으나 하나님은 절대 만홀히 여김을 당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범한 것이다.
하기야 사탄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 피조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사탄의 마음에 움튼 교만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을 심히 미워하신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6:16-19)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지금도 사탄은 성도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빼앗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예닐곱 가지를 새겨 넣고 있다. 그래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한탄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세상에 주입시키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분이시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사랑과 관심을 지니고 있는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 수 있는 사랑을 이 세상의 어떤 종교, 어떤 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도 반증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5:7). 이 무슨 말씀인가?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란 없다. 선인을 위해서는 혹 가뭄에 콩이 나듯 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죄인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이 아직 죄인일 때, 죄를 회개하지도 뉘우치지도 용서받지도 않은 그 때에 하나님에게도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그런 죄인을 위해 죽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인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메시지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분은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성경의 설명을 보자. “하나님께서 고통을 무릅쓰고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해서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일러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온 것은, 세상을 구원하고 다시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들을 신뢰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만 아들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뿐인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도 그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지 성경 17,18절에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께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표현한다.
우리 속담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것은 힘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는지 알고, 그것이 바로 죄인인 사람들 때문임을 알고,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 즉, 영생을 소유하는 생명의 길임을 아는 것은 힘 정도가 아니라 능력이 된다. 망하지 않고 흥하는 지혜가 된다.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은 결코 쉬운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죽음의 길로 내어주셨을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우리와 독생자를 저울질하셨을 수도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이치일 때 하나님의 저울도 당연히 독생자로 기울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주셨다. 고통을 참고, 미안함을 참고 독생자를 쳐다보지도 못하신 채 눈을 질끈 감고 독생자를 내어주셨을 것이다. 이를 본디오 빌라도의 선택과 견주려 하지 말라. 빌라도가 ‘너희가 원하는 자가 예수냐, 바라바냐?’고 물었던 것에는 아무 아픔도 고통도 선택의 고민도 필요치 않았다. 나에게는 이 피 흘림의 책임이 없다며 손을 씻는 정치적인 쇼는 빗댈 것이 못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독생자를 죽이는 고통을 이미 맛보셨다. 그것은 차마 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익히 아셨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이삭을 대신하도록 숫양을 그 자리에 예비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삭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단장의 아픔을 삼키며 이삭을 죽일 수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고통을 덜어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주셔야 하는 고통을 알아주는 존재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토록 괴로워하시며 내어주셔야 하는 독생자를 대신할 수 있는 이삭의 숫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바로 그 어린양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것이었다. 그 유일한 길이 곧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유일(唯一)은 오직 하나라는 의미다.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지에 대해 세상의 사전은 속임수를 썼다. 전지의 뜻에 ‘신불(神佛)은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불(佛)이 들어가는가?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에 침묵한다. 세상뿐 아니라 기독교도 침묵한다. 지식 때문이 아니고 이목 때문이다. 현실적인 유익 때문이다. 개도 물어가지 않을 타협인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세상 눈치나 보는 시시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내 백성이 나를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 침묵하는 것도 타협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첫 고백은 이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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