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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화문화 이해 (상)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 제일교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화를 보아야 하나? 보지 않아야 하나? 영화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성경적 방안을 모색해야 하나? 아래의 글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성경에서 유추한 진리들을 통해서 답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다.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결론부터 생각해본다. 영화나 영화산업에 대해 양극단적인 견해들은 배제되어야 한다. 물론 영화는 성경에 대해 적대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다. 영화는 세속적인 강력한 영향으로 우리의 신앙마저 손상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문화와 완전히 고립되어 사는 것만이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균형을 가지고 타락한 문화가운데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요청이다. 우선 영화가 어떻게 발전되었으며, 영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본 후,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화문화에 대한 최선의 태도가 무엇일까를 상고해보려 한다.

1. 영화와 그에 대한 기독교 반응

1) 기독교와 관계된 영화의 역사 초기의 영화는 대부분 기독교적인 색채가 많았다. 이는 주로 전도자들에 의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영화의 주제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요 종교적인 것도 아니지만 영화가 기독교적인 삶을 영웅적이며 교훈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태도는 매우 우호적일 수 있었고 심지어 교회가 영화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벤허나 쿼바디스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연예계 시스템이 발전하며 영화관이 대형화되고 영화잡지들이 출간되면서 영화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점점 갱사건, 괴물, 음모와 로맨스와 같은 주제로 채워지면서 현실 도피의 장이 되었고 도덕적으로 건전한 내용들이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영화산업의 예술성이 저하되기 시작했고 교회와 영화산업의 관계도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영화가 여론을 형성하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사회는 영화에 대한 검열이 시작되었고, 특히 미국의 영화 제작자와 배급업자들이 자체 검열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가동하는 협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후반에 100편 이상의 영화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미국의 대공황시기에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 감각주의적인 작품들이 등장하여 관능적인 영화의 물결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기독교는 이런 영화들을 정화하는 운동을 촉구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에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영화의 제작 규정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기독교는 영화에 대한 도덕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1950년대에 와서 검열제도가 사라지고 사회 기준이 변화하여 영화 제작 규정과 도덕성에 대한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는 영화 연출가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부모들에게 영화의 내용에 대해 지침을 줄 수 있는 등급 체계가 필요해졌다.

2) 영화의 분류 영화계가 13개(폭력, 누드, 도박, 불륜 등)의 금지조항이 있었지만 그 금지조항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애매모호하고 강제성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와 대립되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그런 가운데 영화들은 G(누구든지 관람가), PG(부모동반을 조건으로 관람가), PG13(부모동반 하에 13세 이상 관람가), R(18세 이상 관람가), X(성인전용 영화로 21세 이상 관람가)를 확인함으로 영화를 선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의 등급 분류 기준도 영화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을 고려한 것이 아니며, 단지 스크린 상에 표현되는 폭력, 섹스, 언어의 정도에 따라 분류된 것일 뿐이다.

3) 영화에 대한 다양한 기독교적 반응 기독교인이 이런 영화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다양하다. 다음은 기독교인이 영화에 대해서 적대적인 관계에서 수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입장에서 살펴본다. (1)회피: 기독교인은 영화에 맞서되 회피하는 사람들로 반응할 수 있다. 이는 영화의 윤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영화를 마귀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영화 문화에 대해 적대시 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자체를 거부하며 영화를 교육이나 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는 자세이다. (2)경계: 영화에 대한 주의(caution)를 요구하며 늘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영화를 볼 수 있지만 분명한 윤리적인 입장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영화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 반응하되 우호적이면서 동시에 배타성을 가진 역설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3)변혁: 신학적인 관점에서 미리 영화를 비판하기보다는 영화 자체에 몰입한 후 신학적인 해석으로 변혁을 시도하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4)수용: 영화 내용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보다 예술성의 심미적인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수용의 형태이다. 윤리적인 판단과 비평보다는 영화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종교적 휴머니즘에 기초해서 통찰을 얻는데 주력하는 자세이다.

2. 영화에 대한 기독교 문화 사상의 적용

리차드 니버(Richard Nieber)의 대표작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다섯 가지 유형의 문화관을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영화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이는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관습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본다. 경건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사상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의 타락한 오락, 학문, 정치로부터 탈출하도록 권면하였고, 근대의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버는 이러한 반문화적인 유형의 삶은 그 자체 내에 문제점을 자기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영화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할 내용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이 영화 산업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2)영화문화의 그리스도: 이는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요 문화의 인도자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토마스 제퍼슨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도덕 교육가로 보았고,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와 문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신학의 본질과 그 문화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안목에서 영화를 평가한다면 영화는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면서 그런 영화문화를 깊이 이해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한 분야로 생각한다.

3)영화문화 위의 그리스도: 이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 긍정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로고스와 주님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높은 위치에 놓고, 문화를 낮은 위치에 놓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경향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 나타났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신앙적인 면과 비교되어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문화로 평가된다. 그래서 이런 관점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영화산업을 주도하고 이끌어 가야할 당위자로 주장한다.

4)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영화문화: 이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양자 간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이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요 문화는 문화이다. 니버는 이런 유형의 대표자가 사도 바울,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등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안목에서 볼 때, 영화가 기독교에 대해 비하하거나 부정적인 암시를 표현할 때, 기독교는 계속 비판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된다.

5)영화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이 유형의 대표자는 어거스틴, 칼빈, 존 웨슬리 등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계는 구속(redemption)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 문화의 문제는 변혁의 문제이다. 세계는 배격 되어서도 안되고 소홀히 여겨져도 안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주장된 그리스도는 죽음과 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문화 속에 사는 인간 생활을 계속적으로 성화시키고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메일: younsuk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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