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는 종교의 자유religious liberty와 성애의 자유erotic liberty 와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성애의 자유는 힘을 얻고, 반면에 종교의 자유는 점점 약화되고 있다. 애틀랜타 시로부터 시작된 동성애와 차별방지법 적용에 대한 논쟁에서 우리는 ‘성애의 자유’의 확산을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 1월에 조지아 주 애틀랜타 소방대장을 해고시킨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룬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글을 올라왔다. 그들의 주장은 종교의 자유를 반대하지는 않는데, 단지 공공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거리가 먼 강단과 집과 사람들의 마음에 제한되는한 종교의 자유는 좋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애틀랜타의 소방대 구조팀의 수장이었던 Kevin Cochran이 해고당함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해고당한 이유는 그의 생각과 관점이 소방대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 일의 발단은 CoChran이 책을 냈는데 그는 성경을 인용해서 ‘동성애가 죄’라고 주장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시장의 관점이었다. 애틀랜타 시장 Reed는 “Cochran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앙은 이슈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애틀랜타 차별방지 정책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이 해고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소방대장으로서의 Cochran의 봉사 능력은 존경하지만 그의 행동과 결정은 그가 거대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직장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Cochran이 해고당한 것은 정확히 말하면 Cochran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종교적 신앙’ 때문이었다. 그가 가진 신앙이 그의 직무수행에 동성애를 행하거나 선호하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Cochran이 낸 책의 제목은 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이었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그는 동성애가 성경이 정의하는 것처럼 ‘역겹고, 저속하고, 부적절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시장인 Reed는 이러한 Cochran의 행동이 시의 차별방지 정책과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바로 성애의 자유erotic liberty가 종교의 자유에 싸움을 거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이런 사건들이 더 많은 사회적 공공장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Albert Mohler는 이 사건에 대하여 “자유는 진공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어느 역사적인 순간이든지, 어떤 자유이든지, 한 자유는 다른 자유와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지금 종교적 자유와 그리고 성애의 자유의 충돌을 보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미국의 헌법이 규정하고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다. 이것은 미국의 존재 이후에 계속 인정되어온 국기의 기본이 된 자유이다. 그런데 성애의 자유는 이제 새롭게 등장한 자유이다. 하지만, 동성애가 주도하는 전쟁은 동성애의 보호와 인정이 바로 그들의 도덕적 사업계획의 핵심이다. 물론 그들은 성의 자유를 강조한다. 문제는 이제 가장 근본적인 자유인 ‘종교의 자유’보다도 ‘성애의 자유’가 더 근본적인 자유라고 인정 받아가는 추세이다. 동성애의 자유의 논리는 이제는 법대들에서, 학교들로, 유행하는 문화 속으로, 이제는 공동정책에, 심지어는 대법원 판결에도 먹혀 들어가고 있다.
사건의 내용은 Cochran이 자신의 책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3명의 다른 직장 동료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는 Reed시장에 의하여 해고를 당한 것이다. 그의 해고의 소식은 공개적으로 동성애 칼럼리스트로 알려진 Frank Bruni에 의하여 기사화 되었다. 그는 Your God and My Dignity 라는 논쟁을 벌이면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자유는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자유를 종교적 예배나 교회, 회당이나 모스크에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밖에서 떠들지 말고 집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정치인들이나 법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점점 더 많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말하면서 단순히 예배의 자유로 제한하는 추세이다. 종교의 자유를 예배의 자유로 대치하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는 예배의 자유를 포함한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예배의 자유에 멈추지 않는다. 거기에 멈추어서도 안된다.
동성애 옹호자인 Bruni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유가 너무 많다고 주장한다. 그는 탄식하기를 “사람을 고용하고 해직하는데 교회가 갖는 차별법에 대한 ‘사역적 예외’에 대한 해석이 너무 광범위하고, 의문의 여지가 있다”라고 했다. 그는 교회가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사역자를 그 사람이 가진 성적인 취향이나 행동, 즉 동성애자라는 것 때문에 해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공격하는 사람을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해고하면서,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보호해야 한다는 균형 잡히지 않는 염치없는 주장이다.
이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전쟁의 최전선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 앞이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은 ‘종교의 자유’와 ‘성애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텍사스의 Cecil Bell의원이 강력한 반동성애법을 추진했다. 만약에 지역 공무원이 동성애 결혼증서를 발급하면 급여를 제한할 수 있는 법을 발안했다. 2005년에 텍사스 주민투표는 동성애 결혼을 금하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연방법원이 2014년에 취소시켰다. 또한 결혼집례자를 보호하는 법안들도 발의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유타 주에서는 결혼집례자가 자신의 신앙과 맞지 않는 동성애 결혼집례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법안을 채택했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새로운 ‘성의 자유, 성애의 자유’가 미국 헌법의 가장 근본적인 자유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식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잠깐 일어나는 일식이 아니라 영구히 고정화 될 수 있는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은 전세계가 전쟁터이다. 한국도 성의 자유가 봇물처럼 터진 것 같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동안에도 유명무실했던 간통법이 폐지되었다. 한국인의 성의 자유와 성의 문화가 온 사회를 뒤덮고 있다. 사회적인 통계를 보면 충격적이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진출하는 일들이 많으면서 성과 관계된 다양한 사회적인 논란이 이민 지역사회의 이슈로 자주 떠오르고 있다. 유럽은 성의 자유와 성애의 자유를 선언한지 오래이다. 심지어는 스웨덴에서는 마루바닥을 유리로 까는 것을 허용하는 법도 생겼다고 한다.
또한 성의 자유화는 왜곡된 아름다움의 정의를 양산한다. 바비인형 덕택에 바비인형 같은 모델들이 많이 생겼다. 이제는 국민들마저도 실현 불가능한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될 바비인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너무 마른 날씬한 모델들이 등장하고 사람들도 실현이 불가능한 비정상적인 미를 추구함으로 국민 건강과 정서에 해를 미친다는 판단들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광고나 패션모델들의 체중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지 않으면 채용할 수 없는 법까지 생겼다.
지난해 8월 미국의 유명 팝가수 비욘세가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페미니스트FEMINIST라는 글씨와 함께 등장한 모습은 극단의 논쟁을 일으켰다. 흑인 페미니스트학자 벨 훅스는 “비욘세는 테러리스트이자 안티페미니스트이다. 자신을 성적으로 표현하는 상업화는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예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미국 퍼듀대학 록산 게이교수는 “여성 스스로가 성적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하고 싶다면 허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은 성을 강조하는 소비문화로 나타나고 있다. 소비문화는 여성의 몸에서 성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섹시하다는 표현이 아름답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외모지상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성의 상품화를 촉진시키는 주요인이다. 외모지상주의는 심각한 수준이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이 선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신조어 ‘착한 몸매’, ‘착한 얼굴’이라는 용어부터 사회적인 왜곡현상을 보여준다.
성경은 마지막 때는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같다고 하신다.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사13:19),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의 예로 들었다(렘23:14). 특별히, 유다서 1:7은 의미심장하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종교의 자유와 성애의 자유에서 종교의 자유가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멸망으로 치달아 내려가는 이 세대의 광란의 폭주를 막을 길이 무엇일까? 마지막 시대에 주님이 주실 부흥의 역사를 갈망한다. 이메일:revdavidkim@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