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주안에서 문안드립니다. 저는 지난 2/16일에 우크라이나를 떠나야 했습니다. 2/12일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의 위기가 있으니 우크라이나에 여행금지 4단계(불이행 시 여권 말소시킴)를 발령하였고 계획되었던 일정 보다 일찍 미국으로 갔습니다. 떠날 때 곧 돌아오리라 생각하고(3/5일 복귀 표 예매) 겨울 옷이 들은 큰 가방 1개 작은 가방 2개만 들고 출국했고 체르니히우 교회와 성도들을 두고 저희만 떠나는 것이 많이 미안하기도 했었습니다.
저희의 미국 첫 방문은 아에타 대표 김의원 총장님이 계시는 워싱턴으로 갔었습니다. 이렇게 뉴욕과 워싱턴에 있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왔다는 이유로(전쟁은 2월 24일에 발발) 여러 교회들과 지인들이 초청하여 선교보고 및 기도회를 인도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뉴욕에 갔었을때에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며 우크라이나에서 동역했던 송요한 목사님(퀸즈장로교회 러시아부)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목사님 덕분으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의 첫 목사 안수를 줬던 변알렉세이 목사님(사마르칸트 대일교회 은퇴)과의 만남과 저가 개척한 사마르칸트 찰힌교회 2대 한일파 목사님(은퇴) 딸 안젤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퀸즈장로교회 김성국 목사님과 사모님과는 28년 만에 만났습니다. 젊은 날 서울 남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겼었는데, 비록 2년 선배이나 옛 친구처럼 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브라질에 2주간 갔다 올 수 있었던 것은 아에타 뉴욕 총회 때에 우크라이나로 바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아에타 인준위원장인 저에게 아마존 성경대학교를 인준 실사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마나우스에서 마우에스에 가는데 만해도 배로 16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이렇게 아마존 강변 따라 많은 목회자들이 세워져 있으나 대부분 신학교를 다니지 않고 사역을 하고 있어 이들을 위해 2018년부터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두고 온 우크라이나 성도들과 매일 SNS로 소통해 왔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체르니히우를 점령했을 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스마트폰을 충전을 하지 못해 이웃의 자전거로 발전기를 돌려 충천하여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성도들은 저희가 떠난 후 바로 전쟁 발발 전에 피난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매회 1,000그리브나(약 4만원)씩 현지은행 계좌로 여러 번 보내는데, 지금까지 보내준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리나(3자녀)와 나탸샤(7자녀중 한명 징병), 스베따(교회 이웃, 열쇠 맡김), 안젤라(아버지와 함께 폴란드로 떠남), 야로센코(외대 행정담당), 마리암(젊은 엄마, 전도대상자), 레나(한때 교회서기), 레나 사모(고 뾰뜨르 목사 부인) 등입니다. 그리고 왈로자(6자녀중 안드레는 징병으로 우크라이나에 남음)는 루마니아로, 알렉 목사(사모와 6자녀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음) 등과 소식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사택은 수도 키이우에 있고 자동차는 다니엘센타(윤상수 선교사)에 두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멘선교회(GMAN, 김정한 선교사)에서 우크라이나 선교사들을 위해 ‘오병이어 우크라이나 선교 네트워크’를 만들어 저의 소개로 우크라이나 56 가정 중 우크라이나에 있거나 국경에서 피난민 사역하는 10 가정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전쟁 중에 있는 분들에게 빵을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빵 굽는 기계를 전달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5월이 되면 우크라이나 국경과 맞대고 있는 국가로 가서 피난민을 도울 예정입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연합신학교 졸업과 입학을 위해 중앙아시아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간략히 소개합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주문진 감리교회에서 세례 받았고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에 대학생선교회(CCC) 활동을 하면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고 직장 다닐 때에 선교사로 헌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나와 신림 소망교회를 개척한 후에 GMS에서 훈련받고 1996년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파송 받아 교회개척과 병원사역, 신학교 강의 및 리서치 사역을 해 오다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두 번에 걸쳐 추방을 맞이했었습니다. 다시 2011년에 키이우의 신학교 책임자로 부임했고 그 후에 키이우 주변 현지 교회들을 순회 및 전도사역을 하다 2019년부터 체르니히우(키이우에서 북쪽 150Km, 벨라루스에서 남쪽으로 60Km)에서 교회 사역과 문화사역, 강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초토화된 체르니히우 시는 인구 30만 명으로 1,300년 이상 되는 고도(古都)로 우크라이나에서 정교회 성향이 가장 강한 우크라이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도시입니다. 1986년 르네프르 강 건너편인 체르노빌의 원전 폭발로 이 체르니히우로 많은 이주민이 들어와 살고 있고 한국인은 오직 저희 가정만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체르니히우 주 수도로 여러 대학교들이 있어 젊은이들에게 한류를 매개로 접근한다면 점점 비종교인 혹은 무신론자로 빠져가는 그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 산업시설이 빈약하여 일자리 찾으러 폴란드와 유럽 등으로 많이 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거의 마비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두려워하고 점점 그 트라우마가 쌓여가는 것 같습니다. 속히 전쟁이 종식되길 기도해 주십시오.
우크라이나가 17세기 중반 이후 1991년 독립 때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주권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4년에 빼앗겼던 러시아 크림 인민 공화국을 다시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공화국으로 돌려받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의 두 개 주의 200백만 백성들을 친러라는 불모로 잡지 않고 그냥 그 땅에서 일상을 즐길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악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특히 부패한 권력자들과 위정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국가를 사랑하며 선교 우크라이나가 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마다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최하영/김순희 선교사
05.07.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