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일생을 통해 교회교육의 이모저모를 논의하기위해 시작되었던 이 글이 벌써 여섯 번째가 되지만 아직도 다니엘서 2장에 머무르고 있다.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고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가 반추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다. 예전에 이야기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3000명 이상의 사람들 중에 다니엘만큼 지식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빼어난 사람이 있을까?
지금까지 다니엘 1, 2장을 통해 우리는 다니엘이 그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게 대처했던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그것을 필자는 한마디로 자기 정체성이라고 정의했지만 이 또한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다만 그 정체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누가 그를 정체감이 충만하도록 가르쳤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당시 다니엘이 15세쯤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교육이 다니엘이 다니엘되도록 만들었음에 틀림없다고 가정한다면(바로 이점에서 필자는 교육의 힘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런 다니엘 시대의 교육을 지금의 그것과 비교할 때 뭔가 큰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 즉 똑같은 교육의 힘을 왜 우리는 지금 다니엘 그 시대처럼 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다니엘 시대에는 있었고 오늘 우리가 잊어버렸거나 등한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다니엘 시대의 교육을 반추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회복되어야 할 세 가지 교회교육의 방향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오늘의 척박한 토양 속에서 교회교육에 온 힘을 쏟고 계시는 분들을 진심 존경하며 이 글이 그분들에게 생각해볼 수 있는 불쏘시개가 되기를 희망한다.
첫째, 오늘의 교회교육은 영성의 삶의 적용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우리의 교회교육은 머리만 큰 사람을 양육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는 2세 교육이든 성인교육도 마찬가지이다. 평신도를 성경박사로 만드는데 힘쓰고 있다. 요즘 교회 커리큘럼은 어느 신학대학의 그것과 견주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과연 영성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사랑으로 가득 차고 있는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실천이 중요하다. 그것이 주님이 늘 강조하신 것이었다. 왜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했던가? 머리만 큰 종교인보다는 손발이 늘 앞서는 사람을 양육해야 한다. 바로 다니엘이 그랬다. 열다섯 살의 중학생이 먼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이방 신상에 바쳐진 후 왕의 식당으로 보내진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당하자 그가 했던 것이 바로 단 1:8에 나와 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는 아는 것만큼 실천했다. 아는 것은 곧 적용을 의미했다.
3가지 필요한 교육 : ①영성의 삶 적용 ②태도와 관계 교육 ③시대정신
아는 것만큼 실천하는 적용, 따뜻한 영성, 시대정신 알면 목적의식 생겨
필자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라는 영화를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에릭 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 연방대표 육상선수로 참가했는데 그는 당시 그가 100미터 달리기 최종 경기가 주일에 펼쳐지는 것을 보고 과감히 포기해 버린다. 온 세계가 난리가 났지만 그는 확고했다. 당시 고국에서 그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주일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그가 주일 결승에 도저히 뛰는 것은 자기 신앙에 맞지 않을 뿐더러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친 자신 역시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그래서 과감히 포기한다. 그리고 그의 종목이 아닌 400미터에 출전하여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한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처음 200미터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인기와 성공의 기회를 과감히 접고 그는 중국 선교사로 떠났고 거기서 그는 죽었다. 영성의 적용, 말과 행동의 일치, 그것이 교회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과연 오늘의 교회교육은 영성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가? 다니엘은 그렇게 살았다. 입과 몸의 일치,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용기, 마음과 행동의 단일화, 바로 오늘 교회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기본자세이다.
둘째, 오늘의 교육은 태도와 관계 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을 가진 사람들을 환호한다. 그러나 영성은 따뜻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숯불을 머리에 쌓으라고 권면한다(롬12:20). 무슨 말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성으로, 논리로, 지식으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아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녹이라는 것이다. 선행을 베풀고, 관계를 확립하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라는 것이다.
이미 태도교육의 중요성은 공립학교 커리큘럼에 녹아져 내리고 있다. 머리만 큰 사람은 스스로에게 유익할지 모르나 공동체의 유익에 절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학자들은 알고 있다. 사회적 정서적 능력의 함양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데 오늘의 교회교육에서는 이런 것에 얼마나 중요성을 두고 있는가?
다니엘을 보자. 그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결심하고 이를 환관장에게 간청(영어성경에는 please test us)한다. 열다섯 살의 아이가 그렇게 관계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후 3년 동안 왕궁학교에서 교육받고 난 직후 느브갓네살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과 해석을 하지 못한 술사(다니엘도 그 그룹에 속했으니 그도 죽음을 당할 수밖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는 위급한 순간에 다니엘의 반응을 보자.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단2:15). 죽음 앞에 선 10대 청소년의 반응 치고는 놀랍지 않은가? 그의 마음은 태연했고 태도는 침착했다. 바로 그런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머리만 큰 사람으로 양육하지 말고 마음이 안정되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교회교육에 없는 것! 바로, 시대정신이다. 하나님은 각자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특별한 과업을 주셨다. 모세의 과업, 바울의 과업, 아브라함의 과업, 그리고 이 세대에서 수행해야 할 과업! 21세기 갈등의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수행하라고 예비하신 과업이 무엇일까?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다니엘은 알았다. 18살 때 그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인간 왕조의 부침을 거쳐 곧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한다는 것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을 통해 그는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후손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계속 이야기했다.
주님의 탄생 후 베들레헴을 찾았던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바로 그들이 다니엘의 후예였다. 시대정신을 알면 삶의 뚜렷한 목적의식이 생긴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그리고 나의 에너지를 집중하게 한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다. 다니엘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귀한 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한다. 교회가 그들의 품이 되어서 잘 키우고 양육하고 비전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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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