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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변화를 결단하는 신앙!

다니엘서를 통하여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다. 시험을 당하고 이를 믿음으로 극복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고 이를 통하여 더 크게 사용하신다는 원칙이다.  

결국 믿음이란 시험의 순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이란 시험이 올 때 나의 개인적 동기나 이익을 위한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믿음 있는 사람은 자기의 손해되는 길을 택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포기하게 되지 않던가? 그런 사람을 히브리서 11:38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다니엘 1장은 포로로 잡혀간 그가 마주쳐야 하는 두 가지 시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왕의 음식을 먹는 것(단1:5)과 바벨론식으로 이름이 바꾸어지는 것(단1:7)이다. 

 첫번째 시험은 이름이 바꾸어지는 것이었다. 환관장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을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치 일제시대에 한국 사람을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의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한다. 유대 이름은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 바벨론은 유다민족의 정체성을 없애고 바벨론의 의식구조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의도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다니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하나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 미사엘은 하나님과 닮은 자, 아사랴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붙잡혀가서 그들은 그들의 이름이 바꾸어지게 된다. 다니엘은 벨트사살(바알의 왕자), 하나냐는 샤드락(바벨론의 태양신인 아쿠로부터 비쳐지는 자), 미사엘은 메삭(비너스 신 같은 자), 아사랴는 아벳느고(바벨론의 신인 니보의 종). 15살의 청소년들이 낯선 나라에 끌려가 일방적으로 이름이 바뀌어지는 일을 거역할 수 없는 일 아니었는가?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니엘서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다니엘이라 계속 지칭하고 있다. 

그런 그가  왕이 지정하여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게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이렇게 다짐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1:8). 

필자는 여기서 감격한다. 악과 부딪칠 때, 악과 타협하고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자칭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번은 괜찮지 않을까? 작은 것인데 뭐 큰일이 나겠어? 누가 보지 않았으니 별 탈 없겠지, 나만 그런가? 모든 사람들도 어려움을 당하면 그렇게 될 거야! 해봤는데 안 되잖아, 이 방법 밖에는 없어... 악과 타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겠지만 그러나 15살 다니엘은 달랐다. 고기를 먹어야 된다는 바벨론 왕의 명령을 그는 그대로 순종하기가 어려웠다. 

놀랍지 않은가? 한 중학생이 자기 나라도 아니고 외국에서 그것도 자기 부모와 떨어져 사는 포로의 신분에서 이방의 습관을 따라야 한다고 했을 때 이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와 함께 잡혀간 많은 유다 젊은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바벨론 왕이 명령한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고민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성경은 그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당시 바벨론 왕에게 드려지는 고기(음식)와 포도주는 바로 바벨론 이방신(마둑/벨, 느보, 이스타르 등으로 불려지는)들에게 바쳐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방신에게 드려지는 음식을 금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금식할 수도 공공연하게 반대 의견을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했던가?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부탁을 한다. 그렇다 해도 이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면 음식 메뉴는 왕이 직접 명령한 것이므로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곧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고 곧 이는 큰 형벌을 감내하여야 하기 때문에. 

생각해보라. 원래 바벨론 사람은 잔인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물었던 기도가 아니었던가? 느브갓네살왕이 유다 마지막왕인 시드기야를 어떻게 죽이는지 기록을 보라. “바벨론 왕이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으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렘39:6).

다니엘의 고민과 결심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왜? 그것은 그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름이 어쩔 수 없이 바벨론식으로 바꾸어졌다고 해도 그의 중심과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진리와 성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 때 마음 정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태도를 기억하라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녀들이 꼭 기억해두어야 할 말씀이다. 그렇게 믿음의 결단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단1:9)고 기록하고 있다. 

두 가지를 명심하자. 첫째,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정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환관장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이셨음을 기억하자. 믿음은 환경의 변화를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닌, 우리가 결단할 때 하나님이 환경의 변화를 이끌어 주심을 명심하자. 환경의 변화를 먼저 보고 결단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둘째, 다니엘과 세 침구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태도를 기억하자. 비록 외국의 전혀 다른 삶의 환경과 조건에 그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떳떳한 삶을 유지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담대하게 환관장에 제안을 한다. 그들에게 채식으로 10일간 먹게 해준 후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 후에 결정하라고. 제안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10일후에 그 결과는 어땠는가? 성경은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보였다(단1:15)고 기록한다. 

다니엘은 그렇지 않아도 될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15살이라는 어린 소년, 포로로 잡혀와 먼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 부모형제와 함께 살지 못하는 신세, 스스로 결정하기에는 수많은 제약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 등등!!! 그런 환경에서 설령 다니엘이 왕이 지정하는 고기와 포도주를 먹었다 해도 우리는 그를 비방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는 뜻을 정했다(단1:8). 그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이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자녀를 키워야 한다. 성경에는 잘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다니엘의 부모는 다니엘을 믿음으로 잘 양육했던 것 같다. 우리 모두 그런 부모가 되자. 그러면 우리 자녀가 다니엘처럼 믿음으로 무장한 사람이 된다. 

hlee0414@gmail.com

0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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