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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종은 종이 아니라 ‘노예’이다

노예들이 팔려가는 섬이 있다. 그 섬에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 평생 그 섬에서 노예처럼 죽도록 일만 하나다가 죽은 것이다. 그 섬에 노예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것을 알게 된 두 청년(모라비안 교도들)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하고 그 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섬에는 노예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노예들을 구하지 위해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노예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일인데, 한번 노예가 되면 평생 노예로 살아서 나오지 나오지 못하는데, 평생 노예처럼 일만 하다 비참하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데, 그들은 노예를 구히기 위해 기꺼이 노예가 된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이 종이 되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종’은 우리가 아는 그런 종이나 하인(servent)이나 둘로스(doulos)로서 노예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종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이사야 53장을 읽노라면 마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을 누군가가 중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예언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 700년 전에 기록된 예언이다. 거기에 나오는 ‘그’를 ‘예수’로 넣어 읽어보라.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이사야 53장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 52장에서도 그 메시아를 종이라고 칭하고 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52:13).

여기에 나오는 종은 ‘에베드’(ebed)라는 히브리어로, 노예를 뜻한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아는 고난 받는 노예라는 것이다. 노예처럼 멸시 천대의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것이다. 노예처럼 채찍에 맞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예처럼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조롱당하고 침 뱉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데,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노예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변명이나 항거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런 수난을 다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종은 모두 노예를 일컫는다. 종과 노예는 전혀 다르다. 고대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종으로 팔려갔다. 빚을 갚을 때까지 종살이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빚을 다 갚으면 자유인이 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 아니다. 주인은 종에 대해 생사박탈권 같은 것은 가지지 않았다. 종은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는 노예라는 신분을 갖고 태어난다. 노예는 평생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아무런 자유도 없다.

노예와 종은 이렇게 다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노예를 종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왜 그랬을까?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이렇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까?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인 나 바울은...” 우리는 종이라는 단어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원어 그대로 하나님이 노예가 되셨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라는 말에는 누구나 “아멘”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다”라고 하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노예가 어떤 존재인가? 노예는 주인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100% 복종한다. 노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산다. 노예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노예의 생명은 100% 주인에게 달려 있다. 노예의 운명은 100% 주인에게 달려 있다. 노예는 주인에게 100% 속해 있다. 노예는 100% 주인에게 의존한다. 노예는 주인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노예는 성공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다.

노예는 하루하루 주인의 은혜로 산다. 노예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 바친다. 죽기까지 복종한다. 노예는 주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섬기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예수님은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구하시기 위해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노예가 되어 이 땅에 오셨다. 모라비안 청년들처럼 노예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노예 취급을 받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탄과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셨기에 그 청년들도 노예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의 행복한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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