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몰락을 막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신앙에 기초한 목회자 리더십을 수행해야 하는 목회자들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로 피터 드러커와 짐 콜린스를 손꼽는다. 드러커가 경영을 리더십으로 격상시켰다면, 콜린스는 드러커의 통찰력을 넘어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처럼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도날드 목사는 콜린스와 그의 연구팀이 내놓은 “강력한 조직의 몰락(How the Mighty Fall)”이란 책을, 성경에서 실례를 들어가며 어떻게 대형교회들이나 인기가 있고 유명세를 타는 기라성 같은 교회들이 단번에 몰락했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How a Mighty Church Falls: What it takes to prevent congregational decline).
콜린스는 조직이 실패에 빠져드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각 단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위험해지는 잘 알려진 비탈길이며, 지도자가 현재 진행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피할 때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조직이 쇠퇴하는 첫 단계는 바로 “성공이 낳은 오만”이다.
“성공만 연구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콜린스는 딱 잘라 말한다. 비즈니스 리더십이나, 심지어는 교회 리더십 관련 책들 가운데도 실패의 원인을 탐구하는 책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책이 성공을 약속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성경 저자들은 실패를 기록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신구약 성경은 위대한 성공담과 더불어 개인의 실패 혹은 공동체의 실패를 자주 들려준다.
성경은 자기 과신, 즉 실패와 파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무모한 자만(콜린스가 “지나친 자부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언뜻 보면 겸손이 부른 성공담보다 오만이 낳은 실패담이 더 많지 않나 싶을 정도다.
다음은 몇 가지 예들이다. 거인 골리앗과 그의 동족 블레셋은 목동 다윗의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 지나친 자만으로 꽉 차 있었다. 훗날 다윗 역시 밧세바와 부정한 관계에 빠질 때 오만에 사로잡힌다. 약 5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웃시야 왕은 성경이 그를 두고,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26:16)라고 말할 만큼 깊은 자만에 빠졌다.
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통제 아래 있는 어떤 것도 잘못되리라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은 성공하기에 충분한 자들이었지만, 자신이 실패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쓰나미로 인해 태평양 연안의 많은 나라가 재앙을 당한 후, 과학자들은 쓰나미가 발생시키는 진동을 조기에 포착하는 감지 장치를 해저에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조직의 지도자가 취해야 할 행동이다. 심각한 문제를 미리 신호해줄 사람을 찾아두고, 구체적인 점검 목록을 만들어 항상 확인하고, 영적인 ‘흐름’을 파악하라. 지금은 작지만 그대로 방치할 경우 반드시 커질 문제가 소리 없이 태어나 자라나지 않도록 자기 과신과 오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과도한 욕심, 비판적 정보 무시, 묘책 찾기, 각 질문 답하기...
쇠퇴 그 시작은 언제? 누가 그 숨은 신호 놓쳤나? 누가 기초신념 무시했나?
누가 잘못된 정보해석과 거짓말했나? 누가 당장의 성공 묘책 요령 추구했나?
두 번째로, 콜린스는 조직의 쇠퇴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문제가 다가올 위험을 모르고 안주하는 자기만족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면에서 자기만족과 정반대인 과도한 욕심이 진정한 문제였다.
과욕은 조직을 처음 만들 때 기초로 했던 핵심 원리를 무시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조직의 영혼을 팔아서까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팽창하는 것이다.
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바울은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해 그들을 권면했다. 대조적인 어구로 자신을 비하하는 대신에 그들의 과도한 욕심을 꼬집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고전4:8, 10).
무리한 욕심은 우리가 현재 어떤 것을 잘하고 있을 경우, 다른 것도 똑같이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으리라는 유혹에서 비롯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지도자 중에는 사업과 관련된 것이든 혹은 신앙과 관련된 것이든 간에 조직의 성장과 확장에만 눈이 먼 자들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는 지도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데, 그들이 능력을 입증해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결과를 낳든 개의치 않고 조직을 더욱 확장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더욱 확장하고 성장시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일관된 개념이다.
윗을 이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솔로몬을 보자. 처음에는 부족한 ‘지혜’를 구할 만큼 ‘총명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요구를 들어줬고, 그렇게 초기 솔로몬의 삶은 놀라운 성공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차차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면서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더욱 많은 말과 병거, 재물과 후궁을 원했다. 일찍이 모세가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 3가지를 멀리하라고, 그것들이 몰고 오는 위험을 기억하라고 경고했음에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솔로몬은 ‘지혜’를 멀리 떠나 ‘더욱 많은 것’ 쪽으로 점점 더 다가가 나중에는 그곳에 눌러 앉아 살았다.
나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사명이 그들의 조직을 더욱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 삼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명을 받는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제대로 훈련받았을 때만 어느 성읍과 마을에서도 이 운동을 아무런 문제없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께서 우려하신 것이 지금까지 수 세기에 걸쳐 반복돼 왔다. 우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기독교 운동을 조직화하고, 중앙집권화하고, 과대 선전하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여오지는 않았는가.
세 번째 단계는 지도자와 조직이 비판적인 정보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고, 귀에 거슬리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나타난다. 위험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않고 회피하면 결국 조직은 심각한 상처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이야기 가운데 하나(왕상22장, 단 한 장으로 된)는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이 나눈 대화다. 두 왕이 길르앗 라못과의 전쟁을 상의하기 위해 만났는데, 경건한 왕 여호사밧은 “우리가 먼저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자”고 제안한다.
아합은 제안을 받아들여 선지자 400명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구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전쟁을 치르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합이 부른 자들은 거짓 선지자였고 결국 아합은 자기 소견에 부합하는 의견을 이끌어냈다.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 여호사밧은, “이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고 물었다.
아합은 매우 주목할 만한 답변을 했다.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미가야가 두 왕 앞에 섰을 때, 그는 정확하게 아합이 예상한 말을 한다. 아합과 여호사밧이 전쟁에서 얻을 결과를 매우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결국 아합은 전장에서 죽는다.
콜린스는 부정확하거나 그릇된 정보를 바탕으로 잘못 판단하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 아마 교회가 직접 정보를 수집하지 않고, 떠도는 말이나 선입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알면 더 많은 염려를 나타낼 것이다.
그렇다, 나도 리더십을 행했던 초기에 다음처럼 시작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말하는데…”, “며칠 전에 들은 얘긴데…”, “많은 사람들이 요즘 느끼기를…” 등이 그 말들이다. 나는 이러한 “말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들인지를 식별해 나가면서 성장했다.
나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가장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그들은 질문을 미리 준비하고 공동체를 대화 속으로 질서 있게 참여시키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이다. 이렇게 잘 준비된 사람들과 그들이 이끄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성도들의 의지와 믿음, 상황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고, 장차 교회가 내디딜 발걸음을 정할 수 있었다. 물론 성도를 일대일로, 소그룹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직접 그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었다.
콜린스가 말하는 네 번째 단계는 “조직이 쇠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묘책을 찾는 것”이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제품이나 이미지 개선에 기대를 갖거나, 훌륭한 컨설턴트를 고용하거나 아니면 홀연히 백마를 타고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새로운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좋은 예다.
성경에서 이러한 예를 찾아보려 했을 때, 떠오른 인물이 사울 왕이다. 다른 나라처럼 되고자 왕을 간절히 원했던 이스라엘은 훌륭한 가문 출신에, 외모와 언변이 뛰어난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마치 프로 스포츠 팀이 슈퍼스타급 선수를 영입하면서 챔피언 자리를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희망에 도취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19, 20). 이것은 마치 문제 해결을 위한 묘책을 발견한 것처럼 들린다.
묘책은 종종 실제로 효과가 있다. 그러나 짐 콜린스는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암시한다.
이스라엘의 묘책으로 등장한 사울 왕은 한때 잠깐 형통했지만 이스라엘을 안정된 왕국으로 건설하고 그들의 위대한 잠재력을 개발시킬 수 있는 내적인 자질을 갖추지는 못했다. 사울은 백성의 압박이 커지자 숨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에 대한 모든 지지를 철회하셨다. 사울이 자기가 승리를 갈망했던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은 매우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교회가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승리를 갈망했던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게 할 것인지, 그의 백성답게 살아가면서 본질적으로 생활이 변하게 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대신, 일시에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하루아침에 부흥하는 교회, 특별한 프로그램, 유능한 교회 직원 같은 단어를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완벽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준비하려 했던 날이 기억난다. 지금 나는 그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뛰어난 설교를 하고 실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고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요령을 부려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에 불과하다.
감사하게도 내 주위 사람들처럼 나는 요령을 부려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사람에게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잘 배우는 사람을 지도자로 훈련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콜린스는 조직이 요령을 부리면 다섯 번째 단계에 이른다고 말한다.
교회 같은 조직에서 믿음과 영성이 마르는 것은 기업에서 현금이 바닥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내가 다시는 오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분은 머지않아 예루살렘 성전이 돌무더기와 다름없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얼마 전 웨일즈의 한 교회건물 앞에 서있었는데 교회 문에 “매매”란 광고문이 붙어있었다. 주춧돌을 보니 웨일즈의 부흥이 절정을 달했을 때 건축된 것이었다. 지금은 주위에 잡초가 무성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조직이 죽음으로 접어들었다면 그 시작은 언제였을까? 누가 그 숨은 신호를 놓쳤을까? 누가 조직의 기초가 되는 신념을 무시했을까? 누가 정보를 잘못 해석하고 거짓된 말을 전했을까? 누가 당장의 성공을 위해 묘책이나 요령을 추구하자고 했을까?
중요한 질문들이다. 무시하면, 강력한 조직도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11.0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