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호 목사 (브라질 새소망교회)
유대 속담에 “의원아 너를 고치라”,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여기서도 행하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의사였던 누가에게는 익숙한 속담이었을 것이다(눅4:23). 이 속담의 뜻은 남의 병을 고치는 의사는 먼저 자신의 병부터 고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 속담은 당시 존재했던 유명한 속담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행하라”는 의사가 자기 병을 먼저 고치는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을 다른 곳보다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행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의사란 남의 병보다 자신이 병을 먼저 고쳐야 한다. 자기가 병들은 상태에서 남의 병을 진료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새 생활 하라고 전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먼저 거듭나고 인격이 변하여 새사람 되고 개선된 생활을 해야 된다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이 “의원아 너를 고치라”고 한 것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못 믿겠다는 불신앙을 표현한 말이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못 믿겠다는 식의 표현이 많았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의원아 너를 고치라”,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뛰어내려라. 그러면 천사가 와서 붙들어 줄 것이 아니냐?” 등의 말이 그것이다(뛰어내려서 죽지 않고 우뚝 선다면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 아니냐는 말). 그러나 주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보여줄 것 없이 들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앙의 족속들은 들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꼭 피부에 닿도록 체험해야 하고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 들음으로 보는 자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근거는 들음으로, 봄으로, 또 성경의 증거로서 충분해야 한다. 지금 그리스도가 현장에 없어도 지나간 일이라도 증거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보지 못했어도 사복음서의 기록을 읽음으로써 분명히 알 수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으나 빈 무덤을 봄으로써 충분하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함은 믿음의 소리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 대한 불신앙적 반발에서 비롯된 말이다. 예수는 우리 때문에 비하당하고 멸시받고 매맞고 수난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로서 생명의 구주이심을 증거 하셨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절대로 “너나 구원하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 평소 생활 속에서 자연 현상을 통해 보고 듣고 깨닫는 증거,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하고, 그래서 만족하는 신앙을 가질 때 그 심령은 변화 받고 건강하고 새롭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성경이 증거함을 보면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들 곁에 늘 함께 계심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의 하는 일을 모두 다 바라보고 계신다.
“센키에비츠(Henryk Sienkiewiez)”의 “쿼바디스”는 사도 베드로가 말년에 로마에서 목회 사역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네로 황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화형에 처하거나 맹수의 밥이 되게 하고 있었는데, 베드로의 신변에 위험을 느낀 성도들의 간청으로 어느 날 새벽녘 베드로는 로마를 탈출하게 된다. 무사히 성을 탈출하였으나 환한 동이 터오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예수님이었다. 베드로는 황급히 엎드려 “쿼바디스 도미네”(quo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었다. “네가 내 양을 버리고 가니 나는 로마에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갔고 그 후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성도들이 고통 받고 핍박 받고 희생당하는 일을 모두 다 주님이 곁에서 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