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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입장에서 현대신학 비판 (6)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Ⅱ. 불트만의 양식비평 (Form Criticism)과 비신화화 (非神話化/demythologization) (2)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경은 단순히 저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난 사건을 기록한 인간적인 기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음서 기자들이 당시 사용할 수 있었던 용어와 개념을 사용했으며 (terms and concepts they had available to them at the time), 그러한 용어와 개념들은 고대 사회의 신화로 된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들이다. 

불트만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이 비신화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신약에 신화적인 용어로 기록된 기적적인 요소가 제거되어야 그 사건의 보편적인 진실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신약성경의 동정녀 탄생,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 오병이어의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 심지어 예수의 부활까지의 기적적인 기록가운데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불트만이 신화라고 부르는 기적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몸의 부활, 등 복음서에 기록된 기적들) 복음의 핵심의 사건들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믿음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4), 그리고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며, 검증 가능한 사실임을 주장한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4-8). 

간하배 교수는 Contemporary world theology, pp.36-38에서 다음과 같이 비신화화 신학을 성경적으로 적절하게 비판한다.

 

(1) 비신화화는 (Demythologization)는 신정통주의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을 기본으로 한 사상이며, 신약성경과는 전적으로 모순된다 (radically at odds with the New Testament itself). 실존주의 철학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이다. 타락한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의 진실성을 왜곡시킨다. 신약의 중심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2) 비신화화는 역사에 근거한 기독교의 기초를 파괴시킨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신학은 기독교를 신화에 기초한 종교로 전락시켰다. 헤르만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불트만의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지 아니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지 아니하시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제 삼일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으시고, 하늘에 오르지 않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 않다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지 오지 않으시리라” 하였다 (리더보스의 글을 간하배 교수의 책에서 재인용 하였음 Harvie Conn, op. cit. 37).  

 

(3) 본래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자체로 확증되며, 그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불트만은 역사적인 예수의 인격과 사역은 기독교의 발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는 기독교를 확립시키는데 너무 짧은 시간이며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위에 세워졌고, 사도들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구주 예수님을 전했다.

 

(4) 비신화화는 신약의 모든 기적들을 신화라 주장한다. 이것은 불트만의 신학이 철저히 인간중심 (radical anthropocentric)임을 말한다.

 

(5) 불트만의 비신화화 신학의 대전제는 현대인들에게 기적을 전하면 (예수님의 몸의 부활과 같은) 믿지 아니하고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신약 본문에서 기적과 같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현대인들이 받아드리며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이다. 복음과 성경 말씀을 받아 드리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불트만은 인간의 타락성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를 대적한다. 성령의 역사로 믿음이 생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4-5).

 

Ⅲ. 폴 틸리히의 존재의 신학 (Theology of Being) (1)

 

폴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는 독일에서 태어나 루터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도 루터교 목사이다. 폴 틸리히는 베를린 대학 (University of Berlin), 튜빙겐 대학 (University of Tübingen), 할레 대학 (University of Halle-Wittenberg)에서 공부를 했고, 그리고 브레스라우 대학 (The University of Breslau)에서 Ph.D. 학위를 받고, 독일 마부르크(Marburg)대학교 신학부의 조직신학교수로 청빙을 받았고, 여기서 철학자 하이데거와 신학자 불트만을 만났다. 히틀러 등장 이후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1933년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리고 나중에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비롯해서 미국의 여러 곳에서 강의했다. 

틸리히의 신학의 특성을 경계선상의 신학 (Theologie auf der grenze/ theology on the border)으로 칭해진다. 왜냐하면 틸리히는 신앙과 회의, 철학과 신학, 유럽과 미국, 기독교와 문화 사이들을 넘나들면서 신학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의 신학 방법을 상관방법(method of correlation)이라고도 불리운다. 틸리히는 신학의 출발을 성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존적 질문에서 출발해서 신학적으로 대답하는 상호의존적이다.

스탠리 그렌츠(Stanley Grenz)와 로저 올슨(Roger Olson)의 책 20th Century Theology에서 폴 틸리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틸리히의 신학적 기여는 전반적인 영향력 측면에서 바르트의 것과 비슷하지만, 접근 방식에서는 정반대다. 바르트는 말씀을 실존적 상황에 적용했지만 그러나 폴 틸리히는 바르트와는 달리 현대 세속 철학에서 (실존적 상황) 출발하며 기독교 신학적 (말씀)으로 대답하여, 철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의 긍정적인 상관관계 (positive correlation)를 추구했다” (114).

그러나 폴 틸리히의 이러한 신학의 변증적인 방법때문에 신학적 교리나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벗어났고, 기독교 (성경적)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틸리히를 무신론자라고까지 비난했다.

 

폴 틸리히 신학의 특징들을 살펴보자. 

 

1) 그의 신학의 방법은 변증적 (dialectic)이다.   

틸리히의 신학적인 전제는 동시대의 실존적인 상황 (Contemporary existential situation)에게 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의 신학 특징은 상황대응형이다 (Answer-to-situation type of the theological work). 이것은 존재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이다 (creative interpretation of existence). 

상황은 인간 존재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촉발시키며,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한다. 이것이 틸리히의 신학의 방법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상황’이란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질문들과 관심들, 즉 “그들이 자신들의 실존에 대한 해석을 표현하는 과학적, 예술적,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인 형식들”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이나 ‘케리그마 신학’(신정통주의)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신학들은 동시대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의 역할을 무시한다. 동시대의 상황으로 부터 제기된 물음에 대답하기보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마치 돌 던지듯이 일방적으로 던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틸리히는  신학을 통하여 기독교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의 실존적인 상황에 적용시킨다.   

 

2) 그는 기독교 메시지와 동시대의 문화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common ground) 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틸리히의 변증적 신학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것이 표현되어지는 동시대의 문화 사이에는 어떤 공통된 지반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은 틸리히의 신학의 가정이다. 이러한 틸리히의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의 신학 체계 전체가 잘못되었다. 

 

3) 틸리히는 그의 신학을 실존주의 철학위에 세웠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의 기본” (ground of being), 혹은 존재 자체라고 했다. 틸리히는 하나님은 어떤 사물(a thing)도 아니고, 어떤 존재(a being)도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과 신학적인 체계 위에(above) 계시며 그 너머(beyond)에 계신다” 주장한다.

하나님은 존재 이상이며 사물 이상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요, 존재의 힘이요, 존재의 기초이다.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것까지도 그를 피조물의 차원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 만큼 무신론적이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란 상대적 의미로서의 존재와 비존재, 유와 무, 긍정과 부정, 삶과 죽음의 개념들을 초월하는 근원적 ‘있음 (being)’ 그 자체를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의미와 비존재의 위협에 처한 인간의 불안을 극복할 용기의 추구에 상응하는 무엇을 가리키는 인간의 상징적 표현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궁극적인 관심”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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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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