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I. 칼 바르트 (Karl Barth)와 신정통주의 (Neo-orthodoxy) (4)
(4)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와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
반틸 (Van Til)이 말하는 “인간의 지식이 유비적(analogical)”이라는 뜻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고에 따라 사고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에 복종하여 사고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 해야 한다는 말이다(Thinking in subjection to God’s revelation and therefore thinking God’s thoughts after him). 인간의 사고는 하나님의 생각에 의존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고를 본떠서 사고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인간의 지식은 파생적이다(derivative).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식만이 본래적 (original)이기 때문이다.
존재도 지식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일의적으로, 혹은 동일하게 공유되지 않는다 (Neither being nor knowledge is ever shared univocally (i.e., identically) between God and creatures). 하나님의 지식은 원형(original)인 반면,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유한하며, 제한된 능력에 맞춰진 외형(copy)이다.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하고 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인간들과의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선함보다 양적으로 더 클 뿐 아니라, 질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피조물의 선하심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술어를 하나님과 유비적으로 공유한다. (Nevertheless, because we are created in God’s image, we share this predicate with God analogically).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아버지의 사랑은 동일하지 아니하다. 사랑에 있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유비적인(analogical) 표현을 통해서 자기의 계시를 피조물인 인간에게 전달하신다.
우리는 항상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식과 피조물인 인간의 지식의 차이를 강조해야 한다 (Creator/creature distinction).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We are, indeed, created in the image of God. Yet, we are not exactly like God. He is God. We are not).
반틸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incomprehensible)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partial)이며, 역설적(paradox)이고, 또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seeming contradiction).”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지식은 유비적(analogical)이며, 역설적(paradoxical)이다. 하나님께는 신비와 역설이 없지만(no mystery and no paradox), 인간에게는 존재한다(Van Til, Defense of Faith, 61). 인간의 지식과 인식은 항상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지식과 인식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한도 안에서 수용적이고, 재구성적(receptively reconstructive)이지, 이성에 근거한 창조적(creatively constructive)이어서는 안된다.
“재구성적”(receptively reconstructive)이라는 말은 인간의 지식 활동은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대로, 그것을 나의 실존 속에 적용시킬 때에 그것이 바른 지식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종속적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결정적(determinative)이며, 그리고 인간의 지식은 부속적(subordinate)이다(Van Til, Defense of the faith, 56).
하나님의 자기 지식에 대한 반틸의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의식은 동어적 (univocal)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자기의 지식은 동일하며, 일관성이 있고, 전혀 모순이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에 있어서 지식의 주체와 객체는 하나이다는 의미이다.
반틸은 하나님의 자기 지식을 “분석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analytical). 여기에서 “분석적”이라는 말은 “종합적인 지식과 구별되며, 주체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얻는 지식이다.” 즉 하나님의 지식은 자신 밖의 어떤 것도 비교하거나 대조하거나 참조해서 얻는 지식이 아닌, 영원히 하나님 스스로 가지는 지식이다는 말이다.
인간의 지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한다. 모든 존재와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 존재는 파생적이며, 인간의 지식도 파생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절대적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피조물은 항상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해야 된다. 인간의 모든 경험과 이성적인 사고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인간이 바른 경험과 바른 사고가 될 수 있다.
(5) 바르트의 신학은 기독론 중심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과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리학 (Church Dogmatics)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그의 낮아지심에서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변하지 아니하시며 더욱 강해지지도 아니하시고 다른 것으로 변하지도 아니하신다. 다른 것과 섞이지도 아니하시며, 멈추어지지도 아니하신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변하지 아니하시고, 변할 수도 없다. 그의 신성이 약해졌다고 가정된다며 그가 성취한 속죄가 의심스러워진다. 그가 겸손(낮아지심)했지만, 그 낮아지심이 그의 신성이 정지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바르트가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주장한 것은 정통적인 기독론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서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다.
바르트의 2가지 서로 충돌되는 이러한 견해는 그의 입장이 변증적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에서 역사적인 예수를 실존주의 사상을 가지고 해석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예수는 원역사(geschichte; 초역사, 의미로서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2) 역사 세계안에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는 문제가 있으며, 신화이다. (3) 예수의 부활은 계시이다. 이 계시 안에서 성령의 새 세계는 육체의 옛 세계를 접촉한다. 그러나 그 접촉은 원의 직선을 접촉함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에 의해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킨다. 바르트의 주장속에서 역사적인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박윤선, 개혁주의 교리학).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계시는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인 자연에 나타나 있지 아니하며, 자유주의 신학이 말하는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도 계시가 아니며, 동시에 성경도 계시가 아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3가지 형태를 말한다:
1)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원형이다 (in Jesus Christ, we have the Word of God in its original form).
2) 성경에서 파생된 하나님의 말씀(in Scripture we have the derivative Word of God):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한에서만 하나님의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 말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역할을 하게 될 때, 곧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의미이다.
칼 바르트는 “그뤼네발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Grunwald, Crucifixion)라는 그림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한다. 칼 바르트의 책상 위에는 이 그림의 사본이 걸려있었다.
이 그림에서 세례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옆에 서서 손에 성경을 들고 긴 집게손가락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요한복음 3장 30절이 펼쳐져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은 성경과 바르트의 신학의 근본을 잘 보여준다. 계시는 성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쇠함을 통해 참된 계시인 그리스도가 흥하게 된다).
3)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3번째 형태는 교회의 설교이다 (the preaching of the Church).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과 무오한 그리스도에 대한 오류가 있는 증언이다. 오류가 있는 설교자가 성경에서 무오한 그리스도가 선포될 때에 오류가 있는 증언을 통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나타난다. 결국 바르트는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수단이 되며, 성경 그 자체는 무오한 기록이 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다.
바르트는 정통주의적인 인식 방법으로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박윤선, 개혁주의 교의학). 그리고 바르트는 예수님의 무죄성은 예수님의 존재 상태는 아니라고한다. “예수님은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그의 본질적인 상태는 우리와 동일하다. 그는 타락 후 내려오는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 이 본성에서 계속적인 죄의 시험을 받는다. 그의 무죄성은 그의 본질상 상태에 족한 것이 아니다.”(바르트, 교회 교의학 vol. 4, 284-85, 박윤선 박사의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인용, 270페이지).
바르트의 이러한 기독론은 전통적인 개혁주의가 아니다. 바빙크는 “예수님께서 그 주체로서는 아담에게서 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영원부터 새언약의 머리로서 택함을 받으셨다. 그의 아버지는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의 인격은 인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인류 밖에서 인류에게 들어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원죄와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가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으니 죄악의 오염과 전현 관련이 없다.”(박윤선, 교회 교의학에서 인용, 271페이지).
KHL0206@gmail.com
03.09.2024